[김당의 시크릿파일] ④전두환의 <양지일지>, 승자의 중앙정보부 '학살' 기록

정치 / 김당 기자 / 2019-04-09 08: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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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접수한 보안사의 '학살 기록'…안기부판 '5공前史'
Ⅱ급비밀인 조직개편 전-후의 편성표와 부서장급 간부 명단까지 기재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된 당시의 편제와 인원은 국가안전기획부가 발간한 〈陽地日誌〉(1985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국가정보기관은 조직 편제 자체가 Ⅱ급 비밀이다. 따라서 공개 책자에는 조직 편제가 기술될 수가 없다. 그런데 국가안전기획부 이름으로 발간한 〈陽地日誌〉(이하 <양지일지>로 표기)에는 개편 전-후의 조직 편성표와 직제, 그리고 부서장급 이상 간부 명단까지 기재되어 있다. 

 

▲ 중앙정보부 기구 개편(1980. 5. 31) 이전의 주요 간부 명단. 출처 <양지일지>

정상적인 정보기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필자가 지난해 <양지일지>를 입수해 1980년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개편 뒤에는 국가안전기획부 기조실장)으로서 중앙정보부 조직 개편을 주도한 이종찬 전 국정원장에게 제시했을 때, 그가 보인 첫 반응도 "나도 처음 보는 자료인데 이런 걸 어디서 구했냐"는 것이었다. 정보기관에서 잔뼈가 굵은 정보맨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 1차적 배경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장세동(張世東)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의 특수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장세동(육사16기)은 군 사조직 '하나회'의 수장인 전두환(육사11기)의 직계 후배이자 전두환이 박쥐부대(보병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도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였다. 

<양지일지>, 조직 편제 공개에 따른 보안성 검토 생략된 채 외부 반출
 

1980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서리(80. 4. 14~80. 7. 18)를 겸했다. 불과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때 전두환과 보안사 '중정 점령팀'은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하는 수술을 단행했다. 당시 3공수여단장이었던 장세동은 예편 뒤에 대통령 심복들이 맡는 경호실장(1981. 7~1985. 2)을 거쳐 안기부장(1985. 2. 19~ 1987. 5. 25)으로 부임했다. 


<양지일지>는 장세동 안기부장이 자신의 주군이자 선임 부장인 전두환에게 헌정한 중앙정보부장서리 재임기간의 '지휘일지'이다. 군(軍)에서는 지휘관이 이임할 때 재임기간의 '지휘일지'를 만들어 헌정하는 오랜 관행이 있다. 물론 군에서도 부대 편제는 군사비밀이다. 하지만 군사(軍史)를 연구하는 학자나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임하는 지휘관과 함께 근무한 참모들만 소지하는 한정된 헌정본이어서 보안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해 오랜 기간 '지휘일지'를 제작해 왔다는 것이다.


<양지일지>의 경우, 일부 부서장의 재직기간을 보면 1985년 3월 재직자까지 기록돼 있다. 이 책자의 존재를 확인해준 국정원 관계자에 따르면, <양지일지>는 전두환 대통령의 '심복 중의 심복'인 장세동이 부장으로 부임한 뒤에 자신의 주군이자 선배 부장인 전두환의 재임중 기록을 '일지' 형식을 빌려 책으로 엮어 '헌정'한 것이다. 이처럼 부장의 지시로 만든 한정판 책자이다 보니 군에서처럼 조직 편제 공개에 따른 보안성 검토가 생략된 채 외부로 반출된 것으로 보인다.

 

▲ <양지일지>는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왼쪽 위)이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그 아래)한 이후 석 달 동안의 재임중 기록을 '일지' 형식을 빌려 책으로 엮어 '헌정'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기록물로 신군부의 주도세력인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가 펴낸 <第五共和國 前史>(1982년)를 들 수 있다. <第五共和國 前史>(이하 '5공前史')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정점으로 한 12·12 쿠데타 세력이 1979년 10·26 사건부터 1981년 4월 11일 국회 개원일 전까지 권력을 찬탈한 과정을 스스로 기록한 책이다. 

 

보안사는 '5공前史'를 1982년 5월 6권의 책(2486쪽)과 3권의 부록(1300쪽 분량)으로 편찬해 한 질은 전두환에게 보내고 나머지 두 질은 기무사 자료존안실에 보관했다. 전두환이 2017년 4월에 출간한 세 권짜리 회고록은 이 '승리를 자축한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5공前史'는 기무사의 Ⅰ급 비밀로 분류돼 있는데 <한겨레>가 이 책자를 입수해 처음 공개한 바 있다(정대하, 독점공개 '5공前史', 한겨레, 2017. 4. 22).

<양지일지>는 106쪽 분량의 '안기부판 5공前史'
 

필자가 입수한 106쪽 분량의 <양지일지>는 △부(部) 편성표 △주요 간부 명단 △주요 행사 △지시각서 △특이사항 △연설문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지일지>의 부제에 '80. 4. 14~80. 7. 18'이란 연대기가 표시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기록이 전두환 부장서리(1980. 4. 14~1980. 7. 17)의 일대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테면 주요 행사는 취임식과 중정 창설 19주년 기념행사, 간부 임명장 수여식, 202기지 준공식 및 순시, 호주 정보부장 접견, 이임 및 신임 주한 미8군사령관 접견, 유공자 훈장 수여, 부장 이-취임식 행사 등 전두환 부장의 동정사진들로 채워져 있다. 연설문은 부장 취임사, 부서장회의 지시문, 기자간담회, 부 창설 기념사, 부장 이임사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연설문에는 전두환 부장과 신군부(보안사)가 10·26 이후 중앙정보부를 점령(접수)한 뒤에 집권을 위한 한 축으로 이용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연설문에는 가장 먼저 정보부에 수술칼을 들이댐으로써 권력기관에 대한 인적 청산과 조직 개편이란 솔선수범을 통해 공직자 숙정과 이른바 '사회 정화'를 선도하려는 신군부의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양지일지>는 국가정보기관(중정)을 접수한 군정보기관(보안사)의 '학살 기록'이자, '안기부판 5공前史'라고 부를 만하다. 연혁을 보면, 10대 전두환 부장서리의 후임은 11대 유학성 부장이다. 그런데 유학성 부장 재임중에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되었다. 안기부로 개편되면서 부장 직급이 부총리급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장관 유학성의 마지막 중앙정보부장 임기는 1980년 7월 18일~1981년 4월 7일 동안이고, 부총리 유학성의 초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임기는 1981년 4월 8일~1982년 6월 1일 동안이다. 연혁을 보면, 정부조직법(법률 제3422호, 1981. 4. 8, 일부 개정) 제14조에 따라 1981년 1월 1일자로 중앙정보부가 폐지하고 국가안전기획부가 신설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정보기관을 접수한 신군부가 보안사의 무력과 중앙정보부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어떻게 집권 시나리오를 전개했는지 보여주는 '승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전두환 부장이 남산 분청사에 도착하면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먼저 차에서 내려 사주경계를 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며 '점령군' 행세를 했다는 점을 지난호에서 밝힌 바 있다.


승자의 기록인 <양지일지>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직개편 배경과 방향, 그리고 주요 내용 등과 관련해 주목할 대목은 전두환 부장의 취임사와 '지시각서'(指示覺書), 그리고 '특이사항'이다. 전두환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지내 정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알았다. 결과적으로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전두환 소령이 17년만에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실세 장군이 되어 군정보기관뿐만 아니라, 국가정보기관까지 차고앉은 순간이었다.

"전두환 중장입니다"로 시작한 짧고 간결한 취임사

 

▲ 전두환 중장의 중앙정부장서리 취임식(1980. 4. 15). 재경부서 과장급 이상 225명이 모인 가운데 “전두환 중장입니다”로 시작하는 짧고 간결한 취임사를 했다. 출처 <양지일지>

중앙정보부장 취임 당일(80. 4. 15) 오전 10시 서울 이문동 본청 강당의 단상에는 평소와 달리 부서장들 자리가 모두 치워지고 부장석과 윤일균-전재덕 두 차장이 배석할 자리만 마련되어 긴장감이 배가되었다. 강당에 재경부서 과장급 이상 225명이 모인 가운데 전두환 신임 부장은 "전두환 중장입니다"로 시작하는 짧고 간결한 취임사를 했다.


당시 중정에 소속된 5000명의 생사 여탈권을 쥔 신임 부장 전두환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어려운 중책을 맡게 되었음은 난국에 처한 국가의 소명으로 생각한다"고 목소리에 한껏 힘을 주었다. 그는 특유의 거만한 음성으로 "당부(當部)는 지난 20여년간 조국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국내외 곳곳에서 국가 보위와 국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수많은 공적을 남긴 바 있다"고 칭찬을 했다. 그러고 잠깐 호흡을 멈춘 뒤에 듣는 이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반면으로 일부 몰지각한 부원들이 월권과 이권개입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며, 또한 과거에 부장직을 역임했던 인사 중에는 현재 국외에서 매국적 추태를 서슴지 않고 있는 자, 자국의 국가원수를 시해함으로써 나라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대역죄를 범한 자 등이 포함되어 있음으로써 지금의 우리 중앙정보부는 상당한 불신을 받고 있다.


여러분! 이제 중앙정보부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만 할 실로 중차대한 시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공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되 비판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중략)…과거 이란의 사바크(SAVAK)가 국민을 괴롭힌 나머지 증오와 저주의 표적이 되어 자체 조직은 물론 국가까지도 결국 파멸시켰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모사드(MOSSAD)가 국민과 더불어 국난을 극복하고 국가를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취임사(1980. 7. 18), 국가안전기획부, 〈양지일지〉, 1985년, 61-62쪽


예상했던 것보다 강한 전 장군의 연설 톤에 강당에 모인 부서장 이상 간부들은 사색이 되었다. '국외에서 매국적 추태를 서슴지 않고 있는 자'는 제4대 부장 김형욱을 지칭했다. 2007년 국정원과거사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김형욱은 김재규 부장의 지시에 의해 1979년 10월 당시 이상열 주불(駐佛) 공사가 중앙정보부 프랑스 연수생 직원들을 시켜 청부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당시에는 김형욱 살해 직후인 데다가 이상열 공사가 귀국한 뒤여서 전두환이 부장서리가 보고받을 직책에 있음에도 김재규 부장의 박정희 시해라는 초대형 사건에 묻혀 '관심밖'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두환은 국정원과거사위의 면담조사(2005. 4. 11)에서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합수부는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김재규 추종세력의 회유 차단 및 군부내 쿠데타 움직임 진압에 생사를 건 입장에서 김형욱 실종 문제에 대해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수사할 여력조차 없었다"면서 "본인은 김형욱 피살 관련 보고를 받았거나 수사한 바가 없으며, 신문을 통해 김형욱 사건을 인지하였고 만일 당시 이상열 공사가 김형욱 살해 사실을 보고하였다면 법적 조치를 취하였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학봉 합수부 수사국장도 같은 면담조사(2005. 4. 20)에서 "당시 합수부 수사 방향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시 김재규 중정부장과 연계된 세력이나 인물을 찾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 김형욱 사건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면서 "합수부는 김형욱 사건의 발생 사실조차도 잘 알지 못할 정도였으므로 이와 관련 이상열 공사를 조사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다(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주요 의혹 사건편 하권(Ⅲ)〉,(서울, 2007. 10), 180~181쪽)

첫 부서장 회의에서 '해체'라는 표현 세 번이나 사용

 

▲ 전두환 부장이 간부 보직변경 신고식(1980년 6월). 당시 현홍주 2국장(맨우측) 이종찬 총무국장(오른쪽 두번째), 이동복 회담사무국장(오른쪽 네번째) 등 낯익은 얼굴의 잔뜩 긴장한 모습이 당시 분위기를 보여준다. 출처 <양지일지>

 

'자국의 국가원수를 시해함으로써 나라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대역죄를 범한 자'는 제8대 부장 김재규를 지칭했다. 김재규는 이미 알려진 대로 '거사'를 치르고 1979년 10월 27일 0시20분께 남산 정보부로 가려다가 정승화 육참총장과 함께 용산 육군본부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김재규의 범행 사실을 전해 들은 정 총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에게 지시해 허망하게 체포되었다. 


'사바크가 되지 말고 모사드가 되어야 한다'는 것만 이종찬 총무국장이 올린 개혁 보고서에 들어 있던 것이고, 나머지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의중이 담긴 취임사였다. 전두환 부장은 취임 엿새 뒤에 남산 분청사 회의실에서 첫 부서장 회의(80. 4. 21)를 열었다. 이날 첫 부서장 회의에는 차장, 재경(在京) 부서장 및 지부장 36명이 참석했다.


'인사과장 소령'에서 17년만에 '점령군 대장'이 된 전두환 부장은 이날 부서장 회의에서 △중앙정보부가 막연하게 보고·정보수집 하려면 해체되어야 한다 △사적인 경로로 기밀이 새나가는 정보부라면 해체해야 한다 △그러한 기구라면 해체하고 부장 이하 전 직원이 물러나야 한다 등 '해체'라는 표현을 세 번이나 사용했다(<양지일지>, 67~70쪽).


산전수전 다 겪은 남산의 간부들은 지척에서 뇌우(雷雨)를 가득히 품은 먹구름이 남산으로 몰려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계속해서 陽地日誌 보면, 전두환은 4월21일 5.17예비검속 준비했다 편이 이어집니다))

 

UPI뉴스 / 김당 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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