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을 김훈답게 하던 쉼표는 어디로 갔을까

문화 / 윤흥식 기자 / 2019-04-08 13:3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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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의 <연필로 쓰기>에 나타난 '구두점의 미학'

김훈은 당대 최고의 문장(文章)이다. 현역 작가로서 그가 부리는 모국어는 단단하면서도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다. 무협지에 비유하자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천하제일검'의 자리에 올랐다.

 

▲ <연필로 쓰기>의 저자 김훈 작가 [문학동네]

 

고수의 초식에는 군더더기가 없어

무협지에 등장하는 절정의 고수들이 펼치는 무공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이다. 하수들의 눈에 불필요해 보이는 움직임조차도 비무(比武)가 끝난 뒤 복기해보면, 여러 수 앞을 내다본 예비 동작이었음이 드러난다.

 

김훈이 신작 산문집을 낸다는 소식을 보름 전쯤 SNS에서 접했다. 그때 눈길을 끈 것은 쉼표(,)였다.

 

▲ 김훈의 신작 산문집 <연필로 쓰기> [문학동네]


책이 서점에 깔리기 전에 SNS에 선보인 산문집의 표지에 김훈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겨우, 쓴다.

'나는 겨우 쓴다'와 '나는 겨우, 쓴다'의 거리는 아득하다. '한국 문학사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는 평을 듣는, 김훈의 그 유명한 소설 <칼의 노래>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태양계와 안드로메다은하 만큼이나 떨어져 있다.

'비가 내린다'와 '비는 내린다'는 하늘과 땅 차이


김훈은 수년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가 내린다'와 '비는 내린다'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분석해서 증명할 수 없지만, 그런 걸 음절마다 따져서 쓰려면 진이 빠진다."


모국어에 대해 이처럼 탁월한 감수성을 지닌 당대 최고수가 불과 세 단어로 이루어진 단문의 한 가운데에 쉼표를 호출해 앉혔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부사 '겨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어렵게' 또는 '힘들여'라는 의미다. 다른 하나는 '기껏해야' '고작'이라는 의미다.


쉼표 하나가 들어앉을 때 새 우주가 열린다


'나는 겨우 쓴다'라는 평이한 문장은 일반적인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첫 번째 의미로 읽힐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겨우' 눈에 띌까 말까 한 구두점 하나가 문장 가운데 자리를 잡는 순간, 의미망은 확장되고 중첩된다. 두 번째 의미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불리는 김훈에게조차 글을 쓴다는 것은 농부가 밭을 갈 듯, 대장장이가 연장을 벼리듯 '겨우 겨우' 진땀을 흘리며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행위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 길어 올린 문장조차도 '기껏해야' 흰 종이 위에 남는 흑연 자국에 불과함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같은 쉼표 하나가 일깨우는 셈이다.


2017년 3월 28일 고시된 국립국어원 한글맞춤법에는 쉼표의 사용법 열다섯 가지가 적시돼 있다. 그중 열두 번째 사용법을 '일산일로파'(김훈이 스스로를 유머러스하게 부르는 표현) 장문인이 펼쳐 보였던바, 비급을 통해 전해지는 해당 초식의 요체는 이러하다.


"어떤 어구가 바로 다음 말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않음을 나타낼 때 쉼표를 쓴다. 일반적으로는 끊어 읽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쉼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어구이지만, 끊어 읽음으로써 해당 어구를 두드러지게 하려는 의도로 특정 어구의 뒤에 쉼표를 쓸 수 있다."


김훈을 김훈답게 했던 쉼표는 어디로 갔을까

지난 주말 시내 서점으로 김훈의 신작 산문집을 사러 갔다. 자세히 보니 그 새 책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김훈을 김훈답게 했던 쉼표는 사라지고 '나는 겨우 쓴다'는 밋밋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작가의 변심이었는지, 출판사의 권유 탓이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되, 당대 최고수가 펼쳐 보인 상승의 무공 한 초식을 미리 맛본 독자로서는 다소 맥빠지는 변신이었다.


김훈은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했다. "한국어로 사유한다는 것은 조사를 연주해간다는 것이다. '은, 는, 이, 가'를 이리저리 뗐다 붙였다 하면서 밀고 가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이 연주하는 조사(助詞)들의 폭을 조금 넓히면 거기에 구두점도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섬세한 언어 감각이야말로 김훈을 김훈답게 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쉼표 하나의 무게는 책 한 권이나 태산의 무게에 비겨도 절대 가볍지 않다.

 

UPI뉴스 / 윤흥식 기자 jardin@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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