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색깔의 옛 모습…시간이 멈춘 듯

문화 / UPI뉴스 / 2019-04-12 08: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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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복의 타박타박 지구촌⑥]
쿠바 트리니다드, 비냘레스

우리는 일상에 지쳤을 때 여행을 꿈꾸곤 한다. 그냥 떨치고 나서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아서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마음 먹었다고 다 할 수 있던가.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여러 곳을 다녔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여행지에 대한 기억을 펼쳐놓으려 한다. 새삼스런 설렘에 나 자신 다시 길 위로 나설지도 모르겠다.

섬나라 쿠바는 아메리카 대륙에 속하고 있어 세상에 알려진 경로는 유럽인의 신대륙 발견과 그 궤를 같이 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상륙한 뒤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고, 1511년부터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도시들을 잇달아 개발하면서 그곳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은 물론 아프리카 흑인들을 데려와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다. 그 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과거는 이제 역사로 남아 미래에 그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시간이 멈춘 듯 옛날을 오롯이 간직한 마을 트리니다드(Trinidad)와 비냘레스(Viñales)를 둘러보자. 

 

▲ 쿠바 비냘레스 계곡 [셔터스톡]

마요르 광장 주변 스페인풍 건물 눈길


트리니다드에 발을 디디면 색깔이 말을 걸듯 다가온다.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작은 마을에 모든 것이 한데 모여 있어 중세유럽의 성곽도시처럼 보인다. 물론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없지만 오밀조밀한 집들이 붉은 지붕을 맞대고 있다. 그 사이로 난 하얀색의 좁은 골목길은 이리저리 굽이치다 조그만 공터를 만나 광장을 이루고, 사람들이 모이는 쉼터가 된다. 그곳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곡도 연주하고 함께 어울려 춤도 추는 열린 공간, 마당이 되는 것이다.

 

▲ 왼쪽에 종탑이 있는 건물이 혁명역사박물관이다. 예전에는 수도원이었다. [남인복]

도시 한가운데 있는 마요르 광장 주변에는 스페인풍의 건물들인 칸데로 궁전, 종탑이 있는 혁명역사박물관, 이스나가(Iznaga) 맨션(건축박물관) 등이 한때의 번영을 전하듯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은 골목길은 자그맣고 동글동글한 자갈이 깔려 울퉁불퉁하지만 아기자기하다. 더욱이 발길에 닳아 반들반들해진 돌들이 햇빛에는 반짝거리다가 그늘이 내리면 예사로운 돌덩이로 모습을 바꿔 묘한 리듬감마저 준다. 


그곳에선 걸음을 빨리할 수 없다. 천천히 걷다가 멈추고 싶을 때 서서 마음에 드는 색깔의 벽에 기대 잠시 쉬어도 좋다. 오래 전 그 길을 오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도 들으려는 듯이 말이다. 집들은 알록달록하지만 화려한 원색은 거의 없다. 연노랑, 주황, 연두, 하늘색 등 옅은 색들이 많아 도시의 분위기를 한결 차분하고 고즈넉하게 만들어준다. 

 

▲ 트리니다드 전경과 골목 모습. [남인복]

쿠바섬 중부 지역에 있는 트리니다드는 식민지 시대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과 럼주를 수출하고 노예를 들여오던 무역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이제 사탕수수 농장은 없어졌지만, 근교에 있는 잉헤니오스 계곡(Valle de los Ingenios, 설탕 계곡)은 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잉헤니오스 계곡


18세기 전성기 사탕수수 농장이 50여 개나 있었다고 하는 잉헤니오스 계곡에 가려면 증기기관차를 타야 한다. 옛날 철길은 낡아서 관광객 전용 열차만 하루 한 번 오전에 떠났다가 오후에 돌아온다. 한 시간 남짓 달리면 거대한 농장 주택에 닿는다. 그곳은 사탕수수로 부를 쌓았던 이스나가(Iznaga) 집안의 소유지로 노예들을 감시하던 ‘이스나가탑’이 유물로 남아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열차 도착시각에 맞춰 전통 수제 공예품 시장도 열려 북적이고, 저택은 박물관으로 바꿔 공개하고 있다. 노예감시탑에 올라가면 광활한 농장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이 탁 트여 자그마한 짐승이 한 마리 움직여도 눈에 띌 정도다. 노예는 감히 탈출을 꿈꿀 수 없다. 너른 벌판의 풍광에 눈길을 뺏기는 것도 잠시일 뿐, 그 용도가 사람들을 잡는 데 쓰였다는 생각에 미치면 마음 한쪽은 오히려 답답해진다. 


시내로 돌아와 독특한 칵테일을 맛볼 수 있는 술집 ‘라 칸찬차라(La Canchanchara)’를 기웃거려 본다. 이곳에선 쿠바의 럼주로 만든 칸찬차라가 유명하다. 럼과 라임즙을 섞은 것에 사탕수수액이나 꿀을 더하고 얼음을 띄워 붉은 흙으로 만든 작고 볼록한 잔에 담아준다. 시원하고 달콤해서 한두 잔 마시면 더위도 잠시 물리칠 수 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사람들은 하나둘 다시 광장으로 모여든다. 어김없이 음악도 울려 퍼진다. 마요르 광장 근처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교회 옆에는 카사 데 라 무시카(Casa de la música)가 있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곡을 들으면서 맥주 한 병을 들고 옆 계단에 앉으면 너나없이 친구가 된다. 국적에 상관없이 서로 어울려 춤도 추는 흥겨운 분위기에 음악도 더욱 신을 낸다. 웬만큼 차분한 사람도 약간의 어깨 들썩임을 아끼지 않고 그렇게 작은 마을의 북적임을 기억에 담아간다.

비냘레스 계곡의 멋진 카르스트 지형 


아바나에서 두세 시간, 차로 달리다 약간 오르막에 들면 불현듯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새의 땅이 나타난다. 마을 입구에 있는 하스미네스(Jasmines) 호텔 전망대에서 산간마을 비냘레스의 멋진 계곡과 마주할 수 있다. 이곳은 특이한 카르스트 지형으로 쿠바의 국립공원인 동시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카르스트 지형은 석회암 지대의 연약한 부분이 빗물이나 지하수에 침식돼 없어져 단단한 바위만 남아 산 모양을 이루고 있는 곳을 일컫는다. 그 단단한 바위들은 모고테(Mogoteㆍ원뿔꼴 언덕)라고 부른다. 들판 곳곳에 불쑥 솟아오른 봉우리들은 단단하기보다는 몽글몽글한 느낌을 주고 있어 계곡을 한 장의 그림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얼핏 제주도의 오름을 연상하게 되지만 땅에 닿은 부분이 완만하지 않고 수직인 곳이 많아 정상까지 올라가기란 전문 산악인이 아닌 한 어려울 것 같다. 


마을 주변에는 석회암 지대가 그렇듯 동굴이 많다. 옛날 원주민들이 거주했거나 노예들이 탈출한 뒤 은신처로 사용한 곳도 여럿 있어 동굴과 관련한 다양한 탐험이 준비돼 있다. 그 중에서도 ‘인디오 동굴’은 동굴 안에 강이 흐르고 있는데, 땅속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내부를 둘러보며 원주민들의 삶에 대해 들을 수 있다. 


색다른 볼거리로는 바위 암벽에 선사시대 그림을 그려놓은 유적지가 있다. ‘선사시대 벽화(Mural de la prehistoria)’라고 안내하고 있지만 사실은 선사시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1961년 쿠바 화가 레오비힐도 곤살레스 모리요(Leovigildo Gonzalez Morillo)가 제안해 4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초기에는 지나치게 과장되고 울긋불긋 튀는 색깔의 그림이 비냘레스의 멋진 풍경을 해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관광 명소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재미있는 것은 별도로 마련된 입구에서 입장료도 받지만 높이가 120m에 이를 정도로 워낙 커서 밖에서도 다 볼 수 있기에 들어가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 담배농장 주인이 직접 시가를 말고 있다. [남인복]

여유가 있으면 담배농장에 가볼 만하다. 아바나 시가공장과 달리 경작과 함께 담뱃잎을 건조하고 시가로 말아서 팔기까지 모든 것을 한 곳에서 다 해낸다. 오랫동안 경작을 해 온 농부가 직접 시가를 마는 것을 보여주는데 담뱃잎 한 장으로 시가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흔히 생각하듯 잎을 썰거나 자르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금방 만든 시가를 피워볼 수도 있다. 


이처럼 쿠바에는 ‘혁명’의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모습을 알아가는 과정이 앞서야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쿠바를 뒤로 한다.

 

글·사진 남인복(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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