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최초공개 중앙정보부 마지막 간부진과 안기부 창설 간부 명단

정치 / 김당 기자 / 2019-05-08 08: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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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의 시크릿파일] ⑧10·26 '반역죄인' 중정, 조직개편·숙정 감수
전두환 부장의 겁박 "운전수까지 전부 잡아넣어 봐야 5천명밖에 안된다"
〈양지일지〉의 조직개편 편성표…정보기관 편제와 역할 연구 중요 사료

지난해 7월 국방부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당시 계엄 검토 문건에 딸린 67장 분량의 '대비계획 세부자료'를 '군사2급비밀' 지정을 해제해 공개했다. 2017년 3월 당시 국군기무사령부(현 안보지원사령부)가 작성한 이 '군사2급비밀' 문건에는 '대통령(권한대행)'이 선포할 '비상계엄 선포문'이 포함돼 있다. 당시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권한대행은 황교안 국무총리였다.


▲ 2017년 3월 당시 국군기무사령부(현 안보지원사령부)가 작성한 '군사2급비밀' 문건인 '(계엄) 대비계획 세부자료' [출처 '(계엄) 대비계획']


유사시 박근혜 대통령 또는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이 선포할 '비상계엄 선포문(붙임4)'에는 "정부는 탄핵 결정 이후 집회/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시위대의 무장 및 폭동, 강력 범죄 확산 등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됨에 따라 공공의 안녕질서를 회복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의 위기를 종식시켜 헌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쓰여 있다. 


이 문서 뒤에는 1979년 10월 27일 대통령권한대행이었던 최규하 전 국무총리가 선포한 계엄선포문도 '참고 자료'로 붙어있다. 또한 문건에는 "민간인을 포함한 사회질서 교란자에 대해 계엄령 위반죄로 신속한 사법처리" 위한 '합동수사본부 편성 및 유관기관 통제방안'도 적혀 있다. 부문정보기관인 보안사가 게엄시에 가장 신경 쓰이는 '유관기관'은 평시에 국가정보기관으로서 부문정보기관에 대한 기획·조정권을 갖는 국정원이었다.


실제로 문건의 '유관기관 통제방안'에 따르면, "국정원은 국정원법을 이유로 계엄사령관의 지시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가능성 내재"라고 전제하고, "비상계엄은 헌법(제77조)에 근거하여 국정원법보다 우선 적용되며, 계엄사령관이 계엄지역 내 행정·사법 업무를 관장함을 통보하고 국정원 2차장(국내담당)을 계엄사로 파견시켜 계엄사령관을 보좌토록 조치"라고 돼 있다. 


또한 문건에는 '계엄사령부 직제령 제7조(합동수사기구 설치)'의 설치근거와 함께 '붙임1(훈령)'과 '붙임2(10·26 합수본부 설치계획)'이 첨부돼 있다. 10·26 사태 당시의 비상계엄 선포와 합동수사본부 설치 등이 40년 뒤에도 군에서는 '전가의 보도'로 간주되는 것이다.


▲ 기무사(현 안보지원사)가 작성한 '계엄 대비계획 세부자료'의 '합동수사본부 편성 및 유관기관 통제방안' [출처 '(계엄) 대비계획']


10·26 직후 전두환이 중정 차장들과 검찰총장·치안본부장을 부른 배경


실제로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를 당하자,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권한대행으로 권력을 승계했다.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유고'와 동시에 '비상계엄 선포'가 의결되자, 계엄사령부(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가 설치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할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곧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윤일균 중앙정보부 1차장(해외담당), 전재덕 2차장(국내담당), 오탁근 검찰총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 정보·수사기관장들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 보안사 요원들은 입구에서 이들의 몸수색을 했다. 전두환은 합수본부장 자격으로 상석에 앉아 박정희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통보했다.


전두환은 특히 중앙정보부에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는 지침과 함께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전두환은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 1차장임을 알고는 이를 수정했다. 


이에 따라 윤일균(尹鎰均) 1차장은, 이희성(李熺性) 계엄사 부사령관(육군 참모차장)이 중앙정보부장서리(79. 10. 30~79. 12. 12)를 맡기 전까지 1차로 부장직무대행(79. 10. 27~10. 30)을 지냈다. 이어 12·12 쿠데타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 참모총장)이 보안사에 체포되어 이희성 육참차장이 육참총장이 되어 계엄사령관이 되자, 윤 차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부장서리(80. 4. 14~7. 17)를 겸할 때까지 2차로 직무대행(79. 12. 13~80. 4. 13)을 지냈다.


12·12 쿠데타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전두환과 그의 보안사 참모들은 대권(大權)을 거머쥐려면 먼저 정보와 언론을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에 성공하자마자 12월 13일부터 중정 차장보를 겸임했다. 직급은 부장서리나 차장보다 낮았지만 정보보고를 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전두환은 또한 1980년 2월 보안사 2처(정보처)에 '언론반'을 설치했다. 중정 차장보 직위와 보안사 언론반의 부하들을 통해 국내외 정보를 실시간으로 보고받은 것이다. 이후 보안사 언론반은 전두환의 지시 아래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의 언론 장악 공작인 K-공작 계획을 실행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중정 차장보 겸임에서 중정부장서리 겸임


전두환은 1980년 3월부터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자신을 중앙정보부장서리 직에 임명해줄 것을 요구했다.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중정 부장의 겸직 규정이 없다는 점과 현역군인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하지만 10·26 이후 이희성 육참차장이 이미 현역군인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된 전례가 있었다. 


이에 따라 12·12 이후 이희성이 정승화의 뒤를 이어 육참총장에 임명되면서 공석이 된 중앙정보부장서리 자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차지가 되었다. 보안사령관으로 중앙정보부 차장보를 겸직하던 그가 보안사령관으로 다시 중정부장서리를 겸직하게 된 것이다.


군인사법 위반 논란 속에 1980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 전두환 소장은 4월 14일 제10대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취임해 국내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동시에 그는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임명한 실·국장, 단장급 간부들로부터 일괄 사직서를 받아 간부들을 대폭 물갈이했다. 

〈陽地日誌(양지일지)〉에는 당시 중앙정보부(1980년 5월 31일 이전) 및 국가안전기획부(1980년 6월 1일 현재) 편성표와 함께 개편 이전과 이후의 주요 간부 명단도 실려 있다. 중앙정보부의 마지막 편성표([표 1])와 간부 명단, 국가안전기획부의 초기 편성표([표 2])와 간부 명단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 중앙정보부의 마지막 편제와 국가안전기획부의 최초 편제 [출처 <양지일지>]

안기부판 5공 전사(前史)를 담은 〈양지일지〉의 조직개편 전후 편성표는 국가정보기관의 편제와 역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정보기관의 실무부서는 통상 숫자로 표기하는 고유명칭과 임무를 위장하는 통상명칭, 두 가지를 병용한다. 예를 들어 감찰실, 비서실 등 직할·참모부서나 기획조정실, 총무국 같은 지원부서는 고유명칭과 통상명칭이 일치한다. 그런데 실무부서는 고유명칭을 숫자로 표기해 실제 임무를 위장한다. 또한 숫자 배열을 흩트려놓거나 부정기적으로 숫자를 바꿔 보안을 유지하기도 한다. 


1980년 5월 당시 중앙정보부 편제를 기준으로, 해외·북한담당 1차장 및 1차장보 산하는 △선임부서인 기획판단국 △9국은 북한정보국 △1국은 해외정보(분석)국 △7국은 해외공작국 △8국은 동북아국 △6국은 통신정보국(대북감청) △5국은 심리전국 등이었다. 통일부의 모체가 된 회담사무국은 남북대화 협상을 전담했다. 


국내담당 2차장 및 2차장보 산하는 △기획정책정보국을 선임부서로 해서 △2국은 보안정보국 △3국은 보안수사국 △4국은 과학보안국(도감청) △대공수사국 △외사국 △안전국 등이었다. 2차장 산하의 전국 지부는 서울분실 등 10개 지부였다. 기획조정관 밑에는 △기획조정실 △총무국 △관리국 △자료국 △비상계획국 △정보학교 등 지원부서가 배치되었다. 


당시 간부 명단은 아래의 [표 3]과 같다.


▲ 중앙정보부 마지막 간부진 명단 [출처 <양지일지>]

 

위 주요 간부 명단을 보면, 몇 명을 제외하곤 임기가 모두 1980년 4월 27일이나 28일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를 기해서 전원 '물갈이'가 되었다는 얘기다. 또한 감찰실장과 비서실장(직대) 등 부장의 직할부서장과 특별보좌관, 그리고 실무부서의 3국장(보안수사국장) 등은 10·26사태 이후에 새로 임명된 간부들임을 알 수 있다. 전임 부장(김재규)을 잘못 보좌한 책임을 물어 전임자들을 전격 해임한 뒤에 새로 임명된 간부들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전두환은 80년 5월 6일 남산 분청사 회의실에서 열린 재경부서장 회의에서 "운전수까지 전부 잡아넣어 봐야 5천명밖에 안된다"면서 "10·26사태 이후 오늘날까지 중앙정보부를 보호해온 사람이 바로 본인"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날 윤일균·전재덕 두 전임 차장까지 거론하면서 이렇게 생색을 냈다(두 차장은 80년 4월 서정화·김영선 차장으로 교체되었다).


"결과적으로 양(兩) 차장을 위시해서 내가 쭉 보호를 했는데 여러분 가운데에는 차장 두 사람은 조사를 하지 않고 왜 그러느냐 했지만, 그것은 나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하고 개인적으로 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차장이 둘인데 어느 차장은 (합수부에) 잡아다 조사를 하고, 어느 차장은 조사를 안할 수도 없고, 차장 둘을 한꺼번에 잡아다가 조사를 하면 정보부를 누가 지휘합니까? 완전히 기능이 마비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두 사람을 연행해서 우리 옆방까지 데려다 놓았다가 내가 그때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도로 복귀시킨 것입니다…중앙정보부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양지일지〉, 85쪽.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윤일균은 공군 정보국과 특무부대 등에서 잔뼈가 굵은 공군 정보장교 출신으로 공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끝으로 중앙정보부 3국장으로 특채되어 차장보(1964년)를 거쳐 준장으로 예편했다가 1차장(1974년)과 10·26 직후 부장직무대행을 지냈다. 


전재덕은 일본군에 징집되어 입대했으나 이동중에 탈출해 중국군 유격대를 거쳐 광복군 제1지대 공작반에서 활동한 독립군 출신이다. 광복후 육사8기로 졸업해 1950년 당시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나중에 중앙정보부의 핵심 간부가 된 김종필과 서정순·석정선·이영근·고재훈 등 동기생들과 근무했다. 전씨는 주일공사 시절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모국 방문 사업을 추진했다. 


하태준 1차장보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이철희 차장보 밑에서 해외공작국장(8국장)을 지냈다. 남북대화 전문가인 정홍진 2차장보는 김정섭 2차장보(1978. 12~1979. 10)의 후임으로 기용되었다. 김정섭 차장보는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정승화 참모총장을 접대하라'는 지시를 받고 사건 현장에 있었다가 조사를 받고 면직되었다. 변규수 특별보좌관(육군 준장)은 보안사 701부대장(육군본부 보안부대장)으로 10·26 사건 다음날부터 보안사의 '중정 점령팀' 팀장을 맡아 중앙정보부 부서장 조사 등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신임 보직을 맡고 나서 6개월만인 4월 28일 보안사로 원대복귀 하거나 예외 없이 일괄 면직되었다. 중앙정보부 개편(80년 6월 1일 현재) 이후의 편성표는 [표3]과 같다.

 

'역적'이 된 중정의 숙정에서 살아남은 7인의 간부들


▲ 1980년 6월 10일 중앙정보부 창설 19주년 기념행사에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가운데)과 부인 이순자씨가 서정화 1차장(왼쪽, 1980. 4~9) 및 김영선 2차장(1980. 4~10)과 함께 축하 케익을 자르고 있다. [출처 <양지일지>]


개편 이후인 1980년 6월 당시 편제를 보면, 국가안전기획부는 기존의 차장보제를 없애고 21국(局)·실(室)과 8개단(團)으로 축소했다. 1차장과 2차장의 담당 영역도 국내와 해외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군과 내무관료 출신인 서정화 1차장(1980. 4~9)은 국내담당 차장, 군 출신의 김영선 2차장(1980. 4~10)은 해외담당 차장을 맡았다. 실무부서의 경우 △1국은 대공수사국 △2국은 정책정보국 △3국은 해외공작국 △5국은 해외정보국 △6국은 북한정보국 △7국은 과학정보국 등으로 단출하게 편제되었다. 


아울러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유지돼온 서울분실을 없애고 전국 지부는 부산분실(부산), 인천분실(경기), 춘천분실(강원), 청주분실(충북), 대전분실(충남), 전주분실(전북), 광주분실(전남), 대구분실(경북), 제주분실(제주) 등 9개분실(지부)로 편제했다. 


기구 개편 이후 주요 간부 명단은 아래의 [표 4]와 같다.


▲ 국가안전기획부 편제로 이어진 중앙정보부 마지막 개편 이후의 편제 [출처 <양지일지>]


기구 개편 이후 간부 명단을 보면, 차관보급인 1, 2차장보 자리가 폐지되고, 기존의 33개 부서가 21개 부서로 축소된 가운데 부서장급 이상 간부 40명 중에서 김만기 감찰실장(전 서울분실장), 김근수 1국장(전 안전국장), 현홍주 2국장(전 기획정책정보국장), 이상열 3국장(전 7국장), 지주선 5국장(전 특별보좌관) 김태서 6국장(전 9국장), 이동복 회담사무국장(전 회담사무국장) 등 7명의 간부만 살아남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헌병감 출신 김만기(경북 문경, 육군 소장)는 감찰실장 재직 중에 국보위 정화분과위원장으로 공무원 숙정을 담당하고 조달청장을 지냈다. 현홍주 2국장은 안기부 국내담당 1차장(80. 10~85. 1)을 역임하고, 국회의원과 주미대사 등을 지냈다. 김근수(경북 상주) 1국장은 현홍주의 후임으로 안기부 국내담당 1차장을 지냈고, 이후 정계 입문해 국회의원과 상주시장에 당선되었다. 중정 창립 멤버인 김태서 6국장은 이후 감사원 사무총장을 지냈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이동복은 1973년 중앙정보부 남북회담사무국 공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겨 줄곧 남북대화 업무를 담당하다가, 1982년에 기업으로 이직한 뒤에 1991년에 다시 안기부장 특보로 복귀해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를 역임했다.


한편, 전두환 부장의 지휘직할 부서장들로 김성진 기조실장, 허문도 비서실장, 김용갑 감찰부실장 등 육사 출신들이 외부에서 기용된 것이 눈에 띈다. 이들은 중정을 점령한 보안사 실세들과 이런저런 연줄이 있었다.


4년제 육사(11기)의 첫 수석 입학·졸업자인 김성진 장군은 전두환 부장과 육사 동기였고, 허문도 전 주일대사관 공보관은 보안사의 실세 허삼수 인사처장(육사 17기)의 부산고 동기였다. 중정 수송과장으로 재직 중에 국방대학원 교육과정에 있던 김용갑 대령(육사 17기) 역시 보안사의 실세인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등과 육사 동기생의 인연으로 감찰실 부실장을 맡았다. 성용욱 정보학교장은 육사 졸업(15기) 후 소위 임관 때부터 중앙정보부에 근무해 부산지부장을 지냈다. 


육사 11기 동기회장을 지낸 김성진은 안기부 차장을 거쳐 본업인 국방과학연구소장으로 돌아가 박정희가 발탁한 핵과 미사일 개발 관련 부서를 해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허문도는 친구인 허삼수의 소개로 전두환의 측근이 되어 허삼수·허화평과 함께 이른바 '쓰리 허'로 불리며 5공 실세로 군림한 가운데 문공부차관과 통일원장관을 지냈다. 김용갑(경남 밀양)은 감찰실장을 거쳐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1985년 2월까지 근무하고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성용욱(경남 산청)은 안기부 1국장과 감사원 사무총장을 거쳐 국세청장을 지냈다.

중정, 보안사 위세에 눌렸다가 유학성 안기부장 취임후 안정


신군부의 보위 실세인 보안사의 위세에 눌려 있던 중앙정보부는 9대 이희성 부장(1979. 10. 30~1979. 12. 12, 2개월)과 윤일균 부장직무대행(1979. 12. 13~1980. 4. 13, 4개월), 10대 전두환 부장서리(1980. 4. 14~1980. 7. 17, 3개월)까지 2~3개월짜리 부장이 거쳐간 과도기를 거쳐 초기 국가안전기획부장인 11대 유학성 부장(1980. 7. 18~1982. 6. 1)이 취임하면서 비로소 안정화된다. 


안기부는 이어 첫 외교관 출신 수장인 12대 노신영 부장(1982. 6. 2~1985. 2. 18)의 취임 이후 △1982년 12월 모국방문 가장 재일동포 간첩단 검거 △1983년 10월 북한의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사건 조사 규명 등으로 성과를 보이면서 1984년부터 다시금 그 기능을 회복해 갔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대 중반부터 야당 정치인들과 시민사회단체 및 대학 운동권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에 나서면서 위기에 몰리자, 자신의 심복인 장세동 경호실장을 안기부장으로 기용하게 된다. 이로써 13대 장세동 부장(1985. 2. 19~1987. 5. 25)이 전면에 나선 전두환 정권은 정부의 공식 기구보다 안기부가 주도하는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의존하게 된다. 이때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을 유행시킨 안기부의 전성기였다.


((계속해서 ⑨'광주사태' 왜곡한 전두환의 '지시각서 2호'와 '국보위' 설치 편이 이어집니다))


UPI뉴스 / 김당 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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