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김정은의 "'백두산대학' 나와야" 한마디에

정치 / 김당 / 2020-02-27 18:00:18
[평양 톺아보기] 4. 수만명 영하 30도 칼바람 맞으며 극한 체험학습
백두산 1월 평균 영하 25도에 최저 영하 47도…혹한에 동상 불가피
평양은 딴 세상…'고난의 행군' 못지 않은 '3중고' 겪는 북한 주민들

"삼성에는 '삼성전자'와 '후자'가 있다." 삼성 임직원들이 사석에서 하는 뼈 있는 농담이다. 삼성은 국내 최고의 글로벌 대기업이지만 삼성전자와 '삼성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후자)로 나뉜다는 쓴 소리다. 삼성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임직원 연봉과 복지혜택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 광명성절을 맞이해 눈내린 평양의 풍경을 담은 2월 16일자 노동신문 [노동신문 캡처]


북한은 평양과 '그밖의 지역'으로 나뉜다. 아니 '격리된다'는 표현이 더 합당하다. 한국에 온 북한이탈주민 출신 통계만 봐도 알 수 있다. 출신지역별 탈북자 통계(2018년)에 따르면, 함경북도(54%)와 양강도(30%) 같은 중국과의 접경지역 출신이 대다수이고 평양 출신은 전무하다.

 

사실 북한에서 평양과 '후자'의 차이는 삼성전자와 '후자'의 차이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다. 영국에서 탈북한 태영호 공사에 따르면, 북한에서 평양시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형벌은 평양에서 추방당하는 것이다. 평양이 아닌 지역으로의 추방은 밑바닥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평양, 몰라보게 달라졌지만…'그림의 떡'인 '쇼윈도 도시'

 

▲ 새해 2019년을 맞이한 수도 평양의 불꽃놀이 장면 [민주조선 캡처]


지난 몇 년 새 평양을 다녀온 재미교포들은 김정은 집권 이후 평양이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말한다.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시내에는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백화점에는 생필품이 가득하고, 시민들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외부에 비친 평양의 정돈된 놀이시설과 고층빌딩의 야경은 '고난의 행군' 시절에 견주면 화려하기조차 하다.

 

하지만 '그밖의 지역'의 북한 주민들에게 평양은 딴 세상이고 그림의 떡이다. 평양은 '쇼윈도 부부'처럼 북한의 현실을 가리는 '쇼윈도 도시'일 뿐이다. 평양을 제외한 그밖의 지역은 여전히 '고난의 행군' 중이다.

 

평양은 겉보기에 화려하지만 북한은 지금 '고난의 행군' 시기 못지 않은 '3중고'를 겪고 있다. 장기간 지속된 유엔의 대북제재로 인한 경제난과 코로나19 감염증 사태, 그리고 '백두산대학 체험학습'이 그것이다. 덜 심각한 경제난을 제외하면, 사실 평양도 3중고에서 예외는 아니다.

지난 2월 16일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광명성절(김정일 생일)을 맞이한 평양은 평온했다. 해마다 열리는 광명성절 중앙기념대회와 경축행사가 처음으로 취소되었지만, 손에 꽃을 든 시민들은 소그룹 단위로 김정일 동상에 헌화했다. 가족 단위 시민들은 때마침 내린 눈과 설경을 휴대폰에 담느라 바쁜 모습이다.

 

▲ 광명성절을 맞이해 김정일 동상에 헌화하러 가는 평양의 아이들 [노동신문 캡처]


그런데 예년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평양 시민들이 일제히 마스크를 쓴 점이다. 북한은 이미 지난 1월 하순에 국경을 폐쇄하고 1월 30일 우리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해당하는 중앙인민보건지도위원회를 설치하고 기존의 위생방역체계를 국가비상방역체계로 전환했다. 그만큼 코로나19 감염증을 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증이다.

 

마스크 쓰고 나타난 보건상 오춘복…노동신문 주요기사 절반 이상이 '코로나19' 기사

 

북한 보건당국은 지난 1월 26일 보건성 국가위생검열원 박명수 원장의 명의로 '신형 코로나비루스(바이러스) 감염증을 철저히 막자'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보건성 부상들은 물론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보건상 오춘복이 방역 마스크를 쓰고 선전교양에 나서 북한의 보건복지부장관이 여성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 남북 보건의료협력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신영전 교수(한양대 의대)가 북한의 보건상(마스크 쓴 여성)과 보건성 부상(그 오른쪽)의 사진과 함께 북한의 코로나19 대비 실태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김당 기자]


북한 당국이 코로나19 사태를 얼마나 위중하게 인식하고 있는지는 관영매체의 보도량에서도 드러난다. 노동신문(27일자 기준) 인터넷판에서 주요기사로 분류된 기사 37꼭지 중에서 12꼭지가 코로나19 관련 기사였다. 26일자에서는 '주요기사' 39꼭지 중에서 절반이 넘는 20꼭지가 코로나19 관련 기사일 정도로 비중이 크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코로나19 감염 실태뿐만 아니라 △남조선에서 사망자 12명으로 증가, 감염자 1261명 △남조선 여러 지역에서 감염자 발생 △남조선 주둔 미군가족에서 첫 감염자 발생 △남조선 군(軍)에서 감염자 계속 증가 △격리 치료받던 몽골인 사망 △대구, 경상북도 지역에 대한 최대 봉쇄조치 시행 △경기도에서 바이러스 전파에 대한 우려 확대 등 남한의 감염 확산 실태를 상세하게 보도해 눈길을 끈다.

 

관영매체 보도의 방점은 선전교양사업에 찍혀 있다. 노동신문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코로나19 감염증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절대로 긴장성을 늦추지 말고 악성전염병을 막기 위한 사업에 전체 인민이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면서 방역사업을 '중대한 정치적 사업'이라고 규정했다.

 

"방역사업은 단순히 전염병의 전파를 차단하는 실무적인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국가, 우리 혁명을 보위하는 성스러운 사업인 동시에 당의 예방의학적 방침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과시하고 나아가서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제도의 위력을 보여주는 중대한 정치적 사업이다. 세계적인 재앙을 가져오는 신형 코로나비루스 감염증이 이 땅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방역사업을 보다 철통같이 강화해 나갈 때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더욱 빛을 뿌릴 것이다."

 

진단 및 치료에 관한 정보도 비중있게 제공하고 있다. 이날 신문은 "최근 어느 한 나라에서 발표한 '신형 코로나비루스 감염으로 인한 폐렴의 진단 및 치료방안'(시험실시 제6판)에서는 전염병의 진단 및 치료방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수정 및 보충했다"면서 새로 보충된 코로나19 감염증의 진단 및 치료방안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지난 19일 중국 국가위생보건위가 에어로졸을 통한 전파 가능성을 처음 인정해 발표한 코로나19 치료방안 제6판에 담긴 내용이다. 중국 위건위가 1주일 전에 발표한 것이다. 그만큼 정보와 경험의 공유 및 전달체계가 더디다는 얘기다.

 

동절기에 '강제학습'과 '극기훈련'에 내몰리는 북한 주민들

 

'시황제'(시진핑 주석)까지 흔드는 중국 사례에서 보듯, 감염병의 급격한 확산은 체제불안까지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런 비상한 국면에서도 평양 시민들은 '강제학습'과 '동절기 극기훈련'에 내몰리고 있다. 

 

▲ 전국 여맹일군들의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답사(2월 19~24일, 왼쪽)와 평양역의 방역 활동을 담은 노동신문 기사. [노동신문 캡처]


추운 날씨에도 평양역은 코로나19 방역활동을 하는 보건일군과 함께 '백두산대학' 체험학습을 떠나는 인민들로 붐빈다. 평양에서 혜산청년역으로 가는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이다. 노동신문의 "'백두산대학'으로 가자"는 캠페인 기사에는 그 광경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평양역은 '백두산대학'으로 마음 달리는 인민의 지향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곳이다. 거의 매일 '백두산대학'으로 떠나는 답사자들과 그들을 바래우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떠나는 사람, 바래우는 사람 모두가 커다란 격정과 희열에 넘쳐 있다."

 

'백두산대학'은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답사행군을 하면서 이른바 혁명전통교양에 대한 체험학습과 동절기 극기훈련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칭한다. 노동신문은 시시때때로 "온 나라 방방곡곡의 일군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 인민군 장병들과 청소년들이 너도나도 백두산에로의 답사길에 오르고 있다"면서 "가자 '백두산대학'으로, 만나자 혁명의 전구에서!"라고 선전한다.

 

북한 주민에게 백두산은 김일성 장군이 항일 유격전을 벌인 혁명의 성지이다. 북한 주민들은 해마다 철마다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답사행군을 가서 체험학습을 한다. 하지만 올해는 유별나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초 이른바 백두산 군마(軍馬) 행군을 다녀와 연말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에서 '정면돌파전'을 제시한 이후 생긴 현상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김정은 "혁명의 지휘성원들은 '백두산대학' 나와야 한다"

 

노동신문에서 '백두산대학'으로 검색하면 27일 현재 41꼭지의 기사가 검색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김정은의 백두산 군마행군을 보도한 '김정은 동지께서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들을 돌아보시었다' 제하의 노동신문 기사(지난해 12월 4일자 1면)에 처음 등장한다. 때 아닌 '백두산대학' 입학 열풍이 왜 생겼는지에 대한 답은 이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노동신문이 전한 김정은 발언의 이 대목이다.

 

▲ 김정은 위원장의 백두산 혁명전적지 군마행군 소식을 전한 노동신문 지난해 12월 4일자 기사 [노동신문 캡처]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들과 사적지들마다에는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의 혁명사상이 그대로 맥박치고 있다. 수령님과 장군님의 사상, 우리 당의 혁명사상과 굴함 없는 혁명정신을 알자면 혁명전적지 답사를 통한 교양을 많이 받아야 한다. 특히 혁명의 지휘성원들이 수령님과 장군님을 닮은 견실하고 유능한 정치활동가들로 자기자신들을 철저히 준비하고 무장하려면 백두산혁명전적지 답사를 통한 '백두산대학'을 나와야 한다."

 

김정은은 구체적으로 "혁명전통교양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산 체험으로 간직하기 위한 사업을 틀어쥐고 해야 한다"면서 "혁명전통교양을 더욱 더 강화하는 것은 현시기 우리 혁명 앞에 나서는 전략적 과업이 된다"고 강조했다. 요컨대 당·정·군 핵심일군들이 모두 '백두산대학'에 입학해 외세(미국)와의 '정면돌파전'에 임하는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또 열차가 혜산청년역에서 삼지연역까지 들어오게 돼 교통문제가 풀리고, 삼지연군의 답사 숙영소와 여관의 수용능력이 개선되어 모든 편의 편의보장 조건이 갖춰진 점을 거론하며 "겨울철에 답사를 조직하지 못할 이유나 구실이 없다"면서 "겨울철에도 혁명전적지 답사를 많이 조직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김정은은 이어 "꽃피는 봄날에 오면 백두산의 넋과 기상을 알 수 없다. 손발이 시리고 귀뿌리를 도려내는 듯한 추위도 느껴봐야 선열들의 강인성, 투쟁성, 혁명성을 알 수 있고 또 그 추위가 얼마큼 혁명열을 더해주고 피를 끓여주는가 체험할 수 있다"며 오히려 '혁명의 시련을 겪어보지 못한 새 세대들'에게 극한 체험학습을 주문했다.

 

노동신문 "백두의 칼바람맛 알면 혁명가 되고 모르면 배신자 된다"

 

▲ '백두의 혁명전통을 영원히 고수하고 전면적으로 구현해 나가자'는 제목으로 '백두산대학'을 언급한 노동신문 12월 5일자. [노동신문 캡처]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운 간부들이 이 발언의 맥락을 놓칠 리 없다.

 

곧바로 다음날 김청동(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 중앙위 박철민 위원장 명의로 "800만을 '백두산대학' 졸업생들로"라는 기고문이 실렸다. 김청동 맹원 800만 명을 '백두산대학'에 보내겠다는 자원 입학 맹세문이었다.

 

노동신문에는 △백두산대학, 혁명전통교양을 강화하여 우리의 혁명진지를 더욱 철통같이 다지자(12, 6) △전당이 백두의 혁명전통으로 철저히 무장하자(12. 7 사설) 기사로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800만으로는 성이 안 차는지 한술 더 떠 △천만을 '백두산대학'에로(12. 10) 기사를 내보냈다. 이어 '백두산대학' 제하의 노동신문 '정론'(12. 11)이 등장했다.

 

노동신문 사설은 "꽃피는 봄날보다 지금처럼 날씨가 차고 바람이 세차게 불 때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를 해야 한다"면서 "백두의 칼바람 맛을 알면 혁명가가 되고 그것을 모르면 배신자가 된다"고 공공연하게 양자택일의 흑백논리를 내세웠다.

 

김정은이 혁명전적지 현지시찰에서 '백두산대학'을 처음 언급한 지 10일 만인 12월 14일 중앙당 선전선동일군들이 백두산지구 답사행군을 개시하는 첫 테이프를 끊었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은의 영도를 맨 앞장에서 받들어 나가는 진격의 나팔수'(당 선전선동일군)들을 필두로 해서 △전국 청년학생(12. 18) △노동계급과 직맹일군(12. 26) △전국 농근맹일군(1. 28) △인민내무군 지휘성원(2. 2) △전국 혁명사적일군(2. 7) △전국 청년동맹일군(2. 17) △전국여맹일군(2. 20)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2. 24) 등의 답사행군이 줄줄이 이어졌다.

 

▲ 달라진 풍경. 광명성절 전까지는 답사행군대원들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으나, 그 뒤로는 성역인 '백두산 밀영고향집' 앞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다. [노동신문 캡처]


광명성절을 전후해 크게 달라진 점은 백두산지구 답사대원들도 마스크를 착용한 점이다. 혁명의 성지인 혁명전적지와 특히 그 중에서도 성역인 '밀영고향집' 앞에서도 금기시된 마스크의 착용을 허용할 만큼 코로나19가 안보위협 요인으로 등장했다는 시그널이었다.

 

답사행군 소식을 전하는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노동신문은 답사행군 취재와는 별도로 행군대를 조직해 '노동신문사 기자, 편집원들의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답사행군대 체험기'를 시리즈를 싣고 있다. '생눈길을 헤치며'라는 제목의 르포기사에서 보듯, 기자들도 백두산 눈밭에서 생고생을 하고 있다.

 

12월 한달 동안은 답사대가 급히 조직된 탓인지 각지의 당 및 근로단체일군과 인민군장병을 비롯한 130여 개 단체의 답사 인원은 9000여 명에 머물렀다. 하지만 1월부터 급증해 노동신문(2. 13)에 따르면,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겨울철 답사행군에 참가한 답사자 수는 전국적으로 5만 명에 이르렀다.

 

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영하 7.8도이다. 12월 평균기온은 영하 21도, 1월 평균기온은 영하 25도이고 최저기온은 영하 47도까지 내려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발이 얼어들고 귀뿌리를 도려내는 백두산의 칼바람을 맞으며 '백두산대학' 체험학습을 해야 하는 주민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동상자들이 생길지는 불 보듯 뻔하다.

 

북한 주민들은 유엔의 대북 제재와 코로나19 방역 비상 국면에 '백두혈통'이라는 김정은이 백마 타고 간 길을 따라 사흘 동안 도보로 답사해야 하는 '3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U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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