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성범죄 솜방망이 처벌이 'n번방 사태' 불렀다

사회 / 주영민 / 2020-03-24 15:09:53
심신미약·음주상태·초범·대학생 등 갖가지 이유로 감형
솜방망이 처분 내려진다면 '사법부 공범' 비난 쏟아질 듯
심신미약·음주상태·초범·대학생….

성범죄 재판에서 판사가 가해자의 감형 사유로 들먹이는 단어들이다.

검찰 내 성추행 문제를 제기하며 국내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을 촉발했던 서지현 검사는 최근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두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서 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코로나19에 위기 대처 능력을 보여주고, 전 세계 칭찬을 듣는 나라가, 전 세계 코로나 감염자 수와 유사한 아동성착취 범죄자 26만 명에는 과연 어찌 대처할 것인가. 지금이 정말 '국가위기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너무 끔찍해서 믿기지가 않는다고? 아니, 생각해보면 사실 이건 너무나 '예견된 범죄'였다"며 "일베, 소라넷 등에서 유사범죄들이 자행됐지만, 누가 제대로 처벌받았나"라고 반문했다.

"누가 제대로 처벌 받았나"라는 서 검사의 반문은 최근 법무부가 공개한 성범죄백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법무부가 지난달 공개한 '2020 성범죄백서'에 따르면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범죄는 집계가 시작된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총 9317건 발생했다.

문제는 불법 몰래카메라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대부분이 벌금형에 처해졌다는 점이다.

총 9317건의 56.5%가 벌금형을, 30.3%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징역형은 763건에 그쳤으며 선고유예도 463건에 달했다.

벌금 액수도 대부분 700만 원 미만으로 절반 이상이 200만~400만 원 사이의 벌금을 물었다.

성범죄에 한국이 얼마나 관대한지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국은 성추행과 미성년자가 동의한 성관계인 '의제강간'만 집행유예를 허용하고 미성년자를 강간했다면 무조건 무기징역이다.

미국은 성폭행범에게 집행유예 자체가 없다. 주에 관계없이 세 번째 아동 성범죄를 저지르면 무기징역이다.

중국은 강간범에 대해서 총살형·거세형 등을 내리는데 피해자가 14세 이하이면 무조건 사형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참수형, 이집트에선 교수형에 처한다.

프랑스에서는 고문·잔혹행위 등이 동반된 강간을 종신형에 처한다.

이들 나라와 달리 한국은 성범죄에 유독 관대하다. 죄가 중해도 항소심 등 상급심을 겪으며 감형된다. 대부분 벌금형에 그치는 이유다.

13세 이상 강간죄에 대한 한국의 양형기준을 미국, 영국과 비교하면 더 암울하다.

일반강간(16세 이상)의 경우 미국은 12년 7개월~15년 8개월, 영국은 4년~8년인데 비해 한국은 징역 1년 6개월~7년으로 양형기준이 훨씬 약하다. 

의제강간(16세 이상)은 한국에선 범죄가 아니다. 미국은 2년 3개월~2년 9개월, 영국은 3년~7년 징역형에 처해진다. 

청소년 강간(13~16세)을 보면 한국은 징역 3~9년, 미국은 19년 7개월~24년 5개월, 영국은 6년~11년이다.

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돼 관련 법률에서 처벌이 강화되고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양형 기준을 강화해도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가벼운 처벌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감형을 해주는 점도 문제다. 피해자가 합의를 해주면 집행유예에 그칠 확률이 높기에 가해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합의를 하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한다.

피해자들은 "가해자 보호자나 변호사가 합의를 해달라고 연락하고 집과 회사로 찾아오기 때문에 소문이 날까봐 합의해줄 수밖에 없었다"며 치를 떠는 게 한국 현실이다. 

심지어 공탁제도로 감형이 가능하다. 피해자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어도 가해자가 공탁금을 법원에 납부해 자신이 합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감형이 이뤄진다.

초범이라는 점도 감형사유가 된다. 성폭행을 당해도 신고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이 감경 요소로 평가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재경지법 출신 한 변호사는 "성범죄의 경우 법관의 재량이 과도해지면 사법 부패와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을 부를 수 있다"며 "대학생이어서, 반성하고 있어서, 술에 취해서 등 온갖 이유로 감형이 가능하다 보니 가해자가 전관 변호사를 고용하면 형량이 크게 줄어 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텔레그램 n번방 중 박사방을 운영한 '박사' 조주빈(25)은 미성년자 등 여성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만들고 이를 텔레그램 비밀대화방을 통해 판매했다.

현재 밝혀진 피해여성만 74명에 달하고 이중 미성년자가 16명이다. 26만 명으로 추산되는 가담자들은 25만~155만 원을 주고 성착취물을 즐겼다. 이들중 상당수가 공범이다.  

n번방 전 운영자인 일명 와치맨 전모(38) 씨는 지난 19일 결심 공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구형받는 데 그쳤다.

n번방에 불법음란물 9000여 건을 유포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지만, 구형량이 작다 보니 내달 9일 이뤄질 선고도 이 수준에 머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 정도 처벌이 과연 법적 정의에 부합하는가. 국민의 법 감정과는 멀어도 너무 멀다. 이들에 대한 강력처벌을 원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250만 명을 넘어섰다.

이번에도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진다면 '사법부도 성범죄 공범'이란 사회적 공분이 터져나올 것이 자명하다.

▲ 주영민 사회부 기자

UPI뉴스 / 주영민 기자 cym@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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