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영 칼럼] n번방에는 그들만 숨어 있을까

사회 / 이원영 / 2020-03-26 16:05:10
여성을 '사냥감' 바라보는 남성문화
가혹한 집단 밀실 성착취 낳은 씨앗
모두가 공범이란 자세로 성찰해야
회사 인턴이던 화영은 동료 인턴 지수로부터 섹스 동영상이 떠돈다는데 영상 속 인물이 화영인 것 같다는 말이 나돈다는 말을 듣는다. 화영은 놀라움과 함께 기억을 더듬는다. 얼마 전 술을 마시다 정신을 잃은 일이 떠올랐다.

중국어 강사로 일하던 때 남자 원장과 맥주를 마셨을 즈음이었다. 아차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맥주에 수면제가 들었겠구나, 직감했다. 화영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휩싸인다.

동영상은 '소라넷'이라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유통됐다. 게시판에선 어느 남성이 술 취해 기절한 여성을 윤간할 사람을 모집했고, 달려든 남자들은 강간 현장을 촬영해 소라넷에 올렸다. 100만 명의 이용자들은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범죄 현장을 킬킬거리며 '소비'했다.

소설가 정미경이 실재했던 음란 사이트 소라넷에서 벌어지는 실화를 바탕으로 2018년 내놓은 다큐소설 '하용가'의 일부 줄거리다. 소라넷은 수사 당국을 비웃으며 음란물 배포와 매매춘의 온상이 되었지만 근절하는 데는 10년이 걸려 2016년에야 사라졌다.

정미경 소설가는 책 출간에 맞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라넷은 대한민국 모든 여성의 창녀화를 꿈꾸었고, 여성의 몸을 저주로 만들어버렸다. 여성의 몸은 찍히고 파헤쳐지고 전유되며 침탈당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성범죄의 온상이 되었던 소라넷 운영자는 지난해 10월 4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대한민국 모든 여성의 창녀화'를 꿈꾸며 수많은 여성을 유린했던 장본인은 법원의 관대한 처분에 느긋한 감방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국민적 공분을 분출케 하는 'n번방' 사건은 10년 동안 음란왕국으로 군림했던 소라넷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더욱 교묘한 방법을 동원했으니 한참 '뒤떨어지는' 수사당국에 덜미를 잡힐 일은 없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들은 소라넷보다 한층 악랄해졌고, 교묘해졌다.

언론을 통해 그들의 만행을 문자로만 전해 들어도 치가 떨린다. 꼼짝없이 '노예'가 된 젊은 여성들은 시키는 대로 치욕스러운 신체 영상을 찍어 보내고 수많은 사람들은 킥킥거리며 이를 돌려본다. n번방에는 수만 명의 남성 회원들이 적지 않은 돈을 내고 회원으로 가입해 이 같은 동영상을 함께 생산하고, 유포하고, 공유했다. 

이번 사건도 지난해 7월 여대생 2명으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이 실제 회원으로 가입해 실상을 낱낱이 파악한 뒤 탐사보도로 이를 알리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경찰의 수사도, 언론의 추적도 없었고 그틈에 n번방 회원들은 악마의 '성'찬식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일류국가를 눈앞에 두었다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참혹한 성범죄가 버젓하게 발생하고, 또 그것을 수만 명의 회원이 광분하며 공유할 수 있을까, 아득할 뿐이다.

추적단 불꽃의 활약으로 n번방 실체가 드러나고 여성들이 들고일어나면서 디지털 성범죄 입법 청원이 지난 1월 국회에 올라갔다. "나 혼자서 그림 그리는 것까지 처벌할 순 없잖아요"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가지고 나 혼자 즐긴다, 이런 것까지 처벌할 거냐" 당시 법사위 법안심사위에 참석했던 국회의원들의 발언이다.

그렇게 수십만 명의 서명을 받아 청원됐음에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성범죄엔) 관심도 없다는 심드렁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한민국 남자들, 그 자리에 모였던 국회의원들의 인식과 크게 다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 남성들은 성을 사고파는 것에 죄의식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런 문화에 포함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런 남자들이 검사도 되고, 판사도 되고, 교수도 기자도 정치인도 된다.

인성보다는 남자들의 용맹성과 남성우월주의의 산교육장인 군대는 비뚤어진 성교육이 이뤄지는 숙주다. 성매매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여성을 '점령'하고 '사냥'한 경험은 남자들끼리의 흔한 뒷담화다.

n번방에 수만 명이 가입해 젊은 여성을 '포획'해 유린하는 장면을 공유하는 게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문화에 한국 남자들은 이미 젖어 있다. 이번에 잡혀 재판에 넘겨진 운영자 조주빈이 참회의 낯빛 없이 준비된 한마디 말을 내뱉고 당당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너희들도 똑같잖아, 뭘 그래"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n번방 가입자들을 공범으로 처벌하고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치솟고 있다. 과연 n번방 속의 그들만 공범일까.

▲ 이원영 사회에디터

UPI뉴스 / 이원영 기자 lw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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