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끝엔 허망함 뿐…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문화 / 조채원 / 2020-06-26 16:00:21
대의명분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 불세출의 영웅으로 살자는 것도,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것도 아닌 평범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신의를 지키자고 목숨을 바친다거나 인생을 송두리째 내던지는 일들은 소시민적 삶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중국 고전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기군상 원작 '조씨고아'가 그런 류다. 좌전(左傳)과 사기(史記) 등의 기록에 기반해 원나라 때 창작된 잡극 조씨고아(趙氏孤兒)는 일종의 '복수극'이다. 주군인 영공의 총애를 받던 조순을 질투한 도안고는 계략을 꾸며 조씨 일가 300명을 모두 죽이려 한다. 그러나 정영 등의 희생으로 조순의 손자인 조씨고아는 살아남고 20년 후 가문을 도륙했던 원수 도안고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가문의 대의가 수많은 개인의 희생을 감수해야 할 만큼 의미 있는 가치라는 공감대가 있어야 복수의 희열도 느껴질 이야기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요즘 세대는 묻는다. 복수, 그거 꼭 해야 속이 시원한가.

고선웅이 각색, 연출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역시 이런 주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렇다고 복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고선웅은 2015년 초연 당시 예술가와의 대화 후기에서 "필요하면 복수는 해야한다, 하지만 반드시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연습 사진. 왼쪽은 정영 역의 하성광 배우, 오른쪽은 한궐 역 김정호 배우. [국립극단 제공]

그래서일까. 고선웅의 조씨고아는 원작에서의 충과 의라는 가치관을 담아내면서도 복수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 동시에 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과 맞바꾸면서 조씨고아를 구했고, 조씨고아는 왜 복수를 했는지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풀어낸다.

고선웅 연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무엇이 같고 다른가

우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조씨 일족을 모두 죽인 후에 시작하는 기군상의 원작과는 달리, 원작에는 없거나 언급되지 않는 인물인 영첩과 신오라는 개를 '복수 서사'의 첫머리에 뒀다. 그 때는 은혜를 입으면 목숨을 다해 갚는 의리가 있었고 서역에서 온 개가 충신과 간신을 구별한다는 신묘한 일들을 믿기도 했다. 그 시대는 그랬다는 말이다. 그러니 현재적 시각과 기준을 잣대로 등장인물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다음으로 '조씨고아'가 아닌 정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조씨고아가 복수를 해야하는 이유에 '가문', '핏줄'의 비중을 덜어낸 것이다. 또한 정영은 아무리 조씨집안의 배려로 공주의 주치의가 됐지만 멸문지화를 당한 집안의 아들까지 떠안고 싶진 않음을 오롯이 드러낸다. 마지못해 그가 아기를 약초상자에 넣어 탈출하게 된 건 신의를 지킨다보다는 자신에게 간절히 애원하는 공주에게 잠시 흔들린 탓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감정에 흔들리고 앞일을 예상하지 못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우연하게도 아기를 궁 밖으로 내보내고 감추는 과정에서 정영과 마주한 여러 사람들 역시 의협심이 강하거나 조씨 가문에 은혜를 입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조씨고아가 살아남아 복수하길 바라며 목숨을 내던진다. 이쯤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복수라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정영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생후 한 달도 안된 아기를 모두 죽이고야 말겠다는 흉폭한 도안고가 빚을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정영은 조씨고아와 자신의 늦둥이를 바꿔치기 하는 데 이른다.

▲ 극 중 정영(오른쪽)이 조씨고아와 자신의 늦둥이 아들을 바꾸며 비통함에 젖어있는 장면. [국립극단 제공] 

정영의 행보를 가로막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 바로 정영의 아내다. "그깟 약속이 뭐라고, 의리가 뭐라고"하며 절규하다 아들을 내준 아내는 자진을 택한다.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정영의 아내는 가문의 복수라는 대의와 인간적 감정 사이에 갈등하는 정영의 또 다른 내면이다. 아내와 아들의 죽음으로 그들과 더불어 행복을 꿈꾸던 정영의 소시민적 삶은 죽고 복수만 남는다.

마지막으로 복수를 결심한 이유를 조씨고아와 정영의 정서적 관계에 기반해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그렸다. 도안고의 양아들로 무예를 전수받으며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조씨고아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그와 그의 가문을 척살해야 한다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씨고아가 각성한 계기는 도안고의 악행, 본 적도 없는 일족들의 몰살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친자식이 아님에도 아낌없는 사랑을 준 아버지 정영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진짜 혈육을 잃었다는 것, 그리고 정영이 스스로의 팔을 끊어내는 결기와 진심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 정영이 조씨고아(오른쪽)에게 도안고에 의해 조씨 가문이 파멸된 정황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장면. [국립극단 제공] 

이러한 충동성과 즉흥성은 어찌 보면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인 주군인 영공의 변덕과도 연결된다. 그는 옳고 그름엔 별 관심이 없다. 시시각각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자를 제거할 뿐이다. 도안고가 벌을 받게 된 순간, 정영은 영공에게 도안고의 가문도 멸족 당하냐고 묻는다. 그래야겠다고, 이번엔 제대로 할 것이라고 말하는 영공의 답에 정영의 표정이 마냥 밝지는 않다.

복수, 무엇을 남겼나

통쾌한 복수는 해피엔딩인가. 조씨고아는 선대의 작위를 계승하게 됐고 조무라는 새 이름도 얻었다. 공교롭게도 무(武)는 창(戈·싸움)을 그치게(止) 하는 평화로움을 의미하는 글자다. 그런데 조씨고아가 조무가 되었다 해도 평화가 오진 않을 것 같다. 이번엔 조무가 척결한 도안고의 후손 중 하나가 살아남아 그에게 칼을 겨눌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복수의 끝은 평화가 아니라 또 다른 복수의 씨앗을 심는다.

20년의 숙원을 이뤘지만 정영은 공허감에 빠져들고 만다. 2막 마지막에 조씨고아를 위해 희생한 이들이 다시 무대에 등장하는데 정영은 이들 중 누구와도 '복수의 기쁨'을 나누지 못한다. 모두 그를 외면하고 스쳐 지나갈 뿐이다. 기쁘지도, 딱히 스스로에게 보람차지도 않은 복수의 허망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정영은 쓸데없는 일에 20년의 시간을 허비한 것일까. 그 질문은 무대 마지막에 홀로 등장하는 검은 옷을 입은 자, 묵자(墨子)가 답을 주는 듯하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 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니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이 이야기를 거울 삼아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살다 가시기를".

상황에 맞춰 흘러가다보니 그렇게 됐고 해야한다고 여겨 이룬 복수니 정영도 남은 생이나마 평안을 찾길 바랄 뿐이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부당한 권력이 횡행하는데 어디 필부필녀들이 나비가 바람에 몸을 맡기며 날갯짓하듯 좋게만 살다 갈 수 있을까. '좋게만 살다 가라'는 말은 자기 탐욕을 채우자고 평온한 다른 삶들을 이리저리 뒤틀어놓는 이들을 향한 일갈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 벌 받는 도안고. [국립극단 제공]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곳곳에 비극성과 주제의식을 담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엄근진(엄격·근엄·진지)'하지 않다. 오히려 익살스러운 대사와 동작들로 관객들을 웃긴다. 대의와 인간 본성 사이에서 첨예하게 갈등하는 정영 역 하성광의 열연은 압도적이다. 그가 아닌 정영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조씨고아 역의 이형훈은 
초연부터 단일캐스팅으로 세 번의 공연을 거쳤다. '원조 조씨고아'의 부담감이 무거울 법도 한데 무대에선 더욱 발랄하게 뛰논다. 또 다른 조씨고아로 홍사빈이 합류했다. 기존 조씨고아를 사랑하던 관객들도 원조와 신예 조씨고아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2015년 처음 무대에 오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초연 직후 동아연극상을 비롯, 연극계의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지난해 국립극단이 실시한 '국립극단에서 가장 보고 싶은 연극' 설문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여 올해 70주년 기념 라인업으로 전격 편성됐다. 본래 6월 25일부터 7월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할 예정이었으며 예매 시작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관련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수도권 방역 강화조치로 공연은 잠정 중단된 상태다. 현재 목표는 코로나19 관련 상황이 나아져 7월 중 예정된 기간 내에 단 한번이라도 무대에 서는 것. 국립극단 측은 "상황이 호전되면 바로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국립극단, 배우, 스태프 모두 만전을 기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온라인 공연을 통해서라도 관객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UPI뉴스 / 조채원 기자 ccw@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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