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순열 칼럼] 추미애더러 누가 부모자식 연 끊으라 했나

정치 / 류순열 / 2020-09-11 15:57:15
일본 영화 '나라야마부시코'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먹을 것이 부족한 산간 마을의 겨울, 주민들이 한밤중 삽과 곡괭이를 들고 뛰쳐나와 구덩이를 판다. 이어 일가족을 끌고 나와 모조리 구덩이에 집어던진다. 울음이 터진 갓난아기까지 예외가 없다.

생매장된 가족의 가장은 절도 현행범이다. 굶주리는 처자식을 먹이기 위해 야음을 틈타 집집마다 걸려 있는 작물을 훑다가 붙잡혔다. 생매장되기 직전 구덩이를 기어올라온 가장은 삽질하는 젊은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읍소한다. "자네는 내 사위 아닌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장인은 사위가 휘두른 삽에 얼굴을 맞고 구덩이로 처박힌다.

냉혹하고, 잔인하다. 살려달라고 읍소하는 장인을 후려친 사위는 패륜아인가, 철저하게 공사를 구별하는 원칙주의자인가.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 '특혜 군복무' 논란의 전개를 보면서 20년 전 본 영화의 충격적 장면이 떠올랐다. 하루 먹고살기도 버거운 화전민들이 어떻게 그토록 초연하게 공과 사를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집단지성'이었을 것이다. 도둑질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중대 범죄일 터. 인연에 얽매이고 인정에 끌려 제대로 단죄하지 않는다면 마을의 질서는 무너지고 그들의 밤은 무법천지가 되었을 것이다.

추 장관 아들의 '엄마찬스'는 법적으로 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의 역린을 건드린 중대 사건이다. 두 번에 걸쳐 휴가를 연장하는 과정은 일반 국민의 상식, 정서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총 23일의 휴가 자체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만 무엇보다 그 과정이 '불공정 뇌관'에 불을 댕겼다. 당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보좌관까지 동원돼 부대에 민원 전화를 하고, 동료 병사들은 탈영으로 인지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러고도 추 장관의 아들은 무탈하게 군 생활을 마쳤다. 절대 다수 평범한 병사들에게 이런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런 터에 여권에선 추 장관을 '쉴드치는' 언설이 쏟아진다. "부모자식 관계도 단절하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라는 한 여당 의원의 변론이 압권이다. 본질을 비틀어버린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민원 전화 한통 하지 않는 장삼이사들은 아들과 연을 끊기라도 한 것인가.

권력 쥔 자들의 병역 특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맨 앞줄에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파워엘리트' 그룹에서 면면히 이어진 고질적 비리다. 2004년 파워엘리트 병역 이행 실태를 대대적으로 취재해 보도한 적이 있다. 대통령부터 장·차관, 국회의원, 법원·검찰 수뇌에 이르기까지 입법·사법·행정 3부 고위직 443명과 그들의 2세를 망라했다.

왜 그렇게 있는 집 자식들은 몸이 부실한 건지, 질병으로 군면제를 받은 사례들이 쏟아져나왔다. 수핵탈출증(속칭 디스크), 급성간염, 기관지천식, 체중과다. 면제사유는 대충 이랬다. 입만 열면 안보타령이던 '원조보수' K의원은 아들이 셋인데 두 명이 급성간염으로 군 면제를 받았다.

시대는 바뀌었다. 파워엘리트들이 병역 면제를 시도하는 유행은 일찍이 지나갔다. 그렇다고 병역 비리가 사라진 건 아니다. 입대후 벌어지는 각종 군생활 특혜는 교묘하게 진행 중이다. 추 장관 사례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추 장관과 그를 쉴드치는 여권은 그들이 욕하던 과거 보수 기득권 세력과 뭐가 얼마나 다른가.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라고, 시민들이 촛불 들어 권력을 쥐여줬더니 하는 짓은 크게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입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면서 행태는 특혜와 비리를 일삼던 과거 구태 세력을 닮아가고 있지 않은가.

'촛불 정신'은 흐릿해졌다. 애초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들에게선 권력의 꿀이나 빨던 과거 수구 기득권 세력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산간 마을 촌부만도 못한 도덕성과 결기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요원하고 무망(無望)한 일이다.

국민정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쉴드치기 바쁜 여권 인사들에게 이번 주말 '나라야마부시코' 시청을 권한다.

▲ 류순열 편집국장

UPI뉴스 / 류순열 편집국장 ryoos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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