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노벨문학상] 루이즈 글릭 "당신의 두 손이 느껴져요…나를 묻는 손길이"

문화 / 조용호 / 2020-10-09 06:41:12
노벨문학상 수상한 10번째 미국 출신 문인
소외·절망·상실 아우르는 '타락한 세계의 시인'
새로운 서정시를 향한 열정과 쉼없는 갱신
코로나 시절 인류를 위무하는 듯한 시편들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즈 글릭(77)은 서정시의 새 목소리를 추구해온 미국의 계관시인이다. 글릭은 고독과 절망을 독특한 사유와 어법으로 소화해 '타락한 세계의 시인'으로 불린다. 개인의 고통이 포괄적인 인간의 문제로 확장되는 언어를 구사해 종래 서정시를 새롭게 갱신함으로써, 한림원으로부터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확고한 시적 표현으로 개인의 존재를 보편적으로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117명 중 16번째 여성이며, 10번째 미국 출신 문인이다. 

▲ 올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루이즈 글릭이 2016년 9월 미국 인문예술 메달 수여식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축하를 받고 있다. [AP 뉴시스]


1943년 뉴욕의 헝가리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롱아일랜드에서 성장한 글릭은 불안정한 심리상태로 인한 거식증으로,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에 중퇴한 후 7년에 걸쳐 상담 치료를 받았다. 당시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언젠가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으며, 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고 술회했다. 글릭은 죽은 언니에 대한 기억을 여러 번 시로 드러냈는데, 그 죽음이 자신의 탄생과 생존의 의미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밝힌 적도 있다.

 

"내 마음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위험한 이유다./ 자아가 없어 보이는 나와 같은 사람들,/ 우리는 불구자고 거짓말쟁이다./ 진리를 위해/ 우리는 인수분해 되어야 할 것들이다.// 내가 조용할 때 그때 바로 진리가 출현한다./ 청명한 하늘, 흰 섬유 같은 구름/ 그 아래 작은 회색 집,/ 불그스름하게 선명한 연분홍색 진달래."('아라라트 34', 번역 양균원 교수)

 

1968년 '맏이'(Firstborn)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한 글릭은 2009년 '마을 생활'(A Village Life)에 이르기까지 10권이 넘는 시집을 발표했다. 1993년 '야생 붓꽃'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초원'(1996년)에서는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목소리를 통해 사랑과 결혼의 문제 등을 재해석하면서 개인적 세계를 보편적 세계로 확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후 출간한 시집들에 실린 시들 역시 페넬로페의 신화로부터 상상력의 영감을 얻어 사랑의 소멸, 기억의 실패, 육체의 와해, 영혼의 파괴 등을 다룬다. 2004년에 출간한 '10월'(October)은 9·11 테러로 미국인들이 겪은 트라우마와 고통, 치유의 문제를 그리스 신화에 빗댄 시집이다.

▲ 루이즈 글릭의 퓰리처상 수상작 '야생 붓꽃', 9·11 테러를 다룬 '10월', '마을 생활'(왼쪽부터). 10여 권에 이르는 글릭의 시집 중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책은 전무하다. 


평자들은 "글릭의 시는 통상적 의미에서 '고백적'이지도 않고 '지적'이지도 않는 비범한 탁월성을 성취한다"고 언급했다. 양균원 대진대 영문과 교수는 "그녀의 시는 미국 시의 한 흐름을 이뤄온 '고백파'의 경향에서 그리고 1970~80년대에 시 운동의 한 동력을 제공한 '언어시'의 지적 경향에서 모두 벗어나 있다"며 "그녀는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기존의 관념이 제거된 공백 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고 분석했다. 글릭은 첫 시집이 나왔을 때 미국의 고백파 시인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시집들에서 자신의 시적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추구하는 가운데 당대 순수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를 굳혔다는 평가다.


양 교수는 "글릭은 시인의 주된 역할은 이미 알려진 것의 기준에 따라 사람들에게 세상을 성실하게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야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서 "이는 글릭의 창작 이론에 대한 요약"이라고 평가한다. 글릭은 자신의 시가 "과거로부터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서 말하기"를 원하고 기존의 권위나 가치에 순응하기보다 "구체적이고 확인 가능한 목소리로 순간에서 발생하는" 지각을 구현하기 바란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 시집 '야생붓꽃'은 "뒤섞인 일련의 극적 독백들"로 구성돼 있다는 평가다.

 

"조용하세요, 연인이여. 얼마나 숱한 여름을 내가/ 살아서 되돌아왔는지, 그게 내겐 중요하지 않아요/ 올해 한 차례 여름으로 우리는 영원에 들어섰어요./ 당신의 두 손이 느껴져요,/ 그 광휘를 풀어놓으려고/ 나를 묻는 손길이."('야생 아이리스' 번역 양균원)

 

꽃의 구근을 매년 여름 땅에 묻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예고하는 기다림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 구근에서 매년 피어나는 꽃은 나를 묻는 그대의 손길이 영원한 사랑의 광휘를 담보하는 손길이라고 노래한다. 영문학자 김구슬 시인은 "루이즈 글릭은 고독, 이혼, 죽음, 가족관계 등 자전적인 요소들을 다루는 시적 기술, 감수성과 통찰력이 뛰어나다"면서 "소외, 절망, 상실 등을 효과적으로 다루어 타락한 세계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실비아 플라스를 제외하고 그녀보다 더 소외와 고독을 미적으로 흥미있게 다루는 시인이 없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글릭의 시가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인류를 위로한다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글릭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 살면서 예일대 영문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는 총상금 10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2억 9910만원)와 함께 노벨상 메달과 증서를 받는다.


■루이즈 글릭

△1943년 뉴욕에서 헝가리계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 롱아일랜드에서 성장. 고등학교 때부터 거식증 앓기 시작, 세라 로런스 칼리지와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

△1968년 '맏이'(Firstborn)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

△1985년 '아킬레스의 승리'(The Triumph of Achilles) 출간

△1990년 '아라라트'(Ararat) 출간

△1993년 '야생 붓꽃'(The Wild Iris)으로 퓰리처상 수상

△2001년 볼린겐상, 미국 계관시인으로 선정

△2003~2004년 전미도서상

△2004년 9·11 테러 대응 시 '10월' 공개, 예일대 교수

△2014년 '충실하고 고결한 밤'(Faithful and Virtuous Night) 출간 

△2016년 미국 인문예술 훈장 내셔널 휴머니티스 메달 수상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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