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맛을 제대로 살리는 건 '오해'라는 참기름"

문화 / 조용호 / 2020-10-23 13:29:49
짧은소설 모음집 '무관심 연습' 펴낸 소설가 심아진
짧은 형식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압축된 아름다움
차갑고 습한 섬 '아일랜드'와 더블린 이야기 눈길
"오해 아닌 건 없어…오해가 아니라고 착각할 뿐"

"이야기마다 딱 맞는 길이와 형태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이야기는 장편으로 늘이면 너무 구구절절해지고, 짧게 압축한 형태로 가야만 재미있는 것들이 있어요.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을 굳이 글로 다시 쓰는 작업은 소모적인 것 같습니다. 드라마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지만 글로 표현할 때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짧은소설 모음집 '무관심 연습'(나무옆의자)을 펴낸 소설가 심아진은 모든 이야기에는 그 내용에 걸맞은 길이와 형식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10여년 동안 짬짬이 써온 200자원고지 30장 안팎 짧은소설은 80장 이상을 요구하는 단편에 비해 훨씬 짧지만, 만만치 않은 깊이와 여운을 지닌 작품들이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스물여덟 편 중 첫머리에 배치한 '섬의 여우'는 이렇게 압축된다.

▲10여 년 동안 짬짬이 써 온 짧은소설을 묶어낸 소설가 심아진. 그는 "모든 이야기는 그 내용에 걸맞은 길이와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섬의 여우와 섬에 온 여자는 매일, 고립된 채로 함께인 아침을 맞았다. 여자는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는 여우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게 타당한 일이라는 듯, 여우는 언제나 거리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흰 꼬리 여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자의 뜰을 찾았다. 그녀가 떠나온 곳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자는 더욱 간절히 여우를 기다린다. 여자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여우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다. 여우야, 밥 먹어.… 여자는 목청을 더 높여 여우를 부른다. 여우야! 여자는 여자의 섬으로 오는 신중한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하여, 여우처럼 한껏 귀를 곤두세운다.'

 

심아진은 '차갑고 습한 바람이 부는 섬나라' 아일랜드에서 고립된 채 살아간 적이 있다. 그 시절 집 뜰로 찾아오곤 하던 여우에게 밥을 주며 교감했다. 소설에서 여자는 살던 곳과 단절된 채 섬에서 고독한 일상을 반복하는데, 그녀와 규칙적으로 관계를 맺는 대상은 사람이 아닌 여우다. 어느날 아침 그 여우가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지각을 하면 일터에서 해고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며 애타게 여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여자의 일상을 압축해놓았다. 이 짧은소설의 키워드는 '여자의 섬으로 오는 신중한 발소리'일 것이다. 누구인들 자신의 심장을 울릴 그 신중한 발소리 하나, 그립지 않을까.

 

'남자의 어머니는 조금도 분노하지 않았다는 듯 차분하게 비닐봉지를 뒤집는다. 그런 절도 있는 동작과는 대조적으로, 빨갛게 윤나는 사과들이 처량한 소음을 만들며 떨어져 내린다. 쉽게 멍들고 깊숙이 깨지는 소리가 거리를 울린다. 여자는 비탈길을 따라 굴러 내려가는 사과들을 무력하게 바라본다. 남자가 떠난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사과를 먹지 않는다. 여자는 오로지 꿈에서만 사과를 먹는다. 가끔 여자는 사과가 가슴에 낸 멍을 어루만지며 등을 구부린 채 신음한다.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남자는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예전에 비탈진 골목길에 흩어졌던 사과의 행방을 궁금해 한다. 비탈길의 굴곡을 따라 물처럼 흘러내렸던 사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날마다 흘려보낸 사과로 미망의 길을 낸 남자는 향기로 이미 알 수 있다.'

 

'사과'에서는 드라마를 전개하는 대신 상상력을 자극하는 서사시처럼 이야기를 전개한다. 심아진의 말처럼 구구절절 디테일을 늘어놓아야 하는 드라마나, 상상을 자극하는 대신 직접 특정 장면들을 들이미는 영상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글로 표현된 장르만의 매력이 상징적인 작품이다. 활자라는 기호를 눈으로 접하고 이를 뇌에서 해독하면서 자신만의 상상력을 보태는 작업이 독서의 장점인 만큼, 활자가 흘러내리는 골목길을 좇다 보면 사과의 행방도 읽는 이들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찾아낼 수 있을 터이다.

▲아일랜드 모허 절벽 앞에 선 심아진. 이번 소설집에는 그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4년 동안 체험했던 고독한 일상도 응축돼 있다. [심아진 제공]  

 

더블린 시절 심아진은 아일랜드 문학 단체들이 자주 개최하는 '짧은글쓰기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한 문학 모임에 가본 적 있는데 그곳의 지도강사가 그녀가 낸 짧은글을 보고 참가를 권유한 것이다. 망설이다가 전문가에 제대로 번역을 맡겨 참여한 결과 10위 안에 든 적도 있다고 했다. 아일랜드는 명실공히 문학의 나라. 더블린이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날을 기념한 '블룸즈데이'(6월 16일)에는 매년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조이스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그때가 되면 더블린을 많이 찾아요. 문학 때문에 엄청나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인데, '율리시스'의 주인공 블룸이 걸었던 곳을 찾아가 소설 속 행동을 재현하면서 축제를 즐기는 거죠. 궁궐도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게 없는 나라가 문학에 대해서는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요즘 아일랜드도 코로나19가 심각한데, 이곳 사람 기질이 카페나 술집에서 이야기 나누는 걸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랍스터 도둑'도 더블린에서 건진 소재인데, 아일랜드 사람들의 기질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처음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레스토랑 수족관에서 랍스터를 도둑맞은 주인을 돕기 위해 각종 제보를 하는 과정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삶을 사는지, 더블린이라는 공간이 어느 정도 아주 작은 것들까지 많은 이들에게 공유된 밀착된 곳인지 잘 드러낸다.

 

'아기 새들은 다급한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했습니다. 나는 겨우내 완전히 소진해버린 단백질을 정신없이 보충합니다. 두 마리, 혹은 세 마리였을 텐데, 미처 세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제대로 보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입가에 묻은 붉은 피와 보드라운 깃털 몇 개를 닦아내며 만족스럽게 돌아섭니다. 하지만 돌아서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벌써 불안합니다. 누가 나를 보지는 않았겠지요? 당신들이 알고 있는 그것이 나라고 확신하지 마세요. 내 이름이 날다람쥐든 청설모든, 프레리도그든 슈거글라이더든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내 본질을 드러내는 건 아니니까요.'

▲심아진은 "내게 무관심하면, 의도적으로 나를 외면하면 우리를 위한 공간이 분명 더 생기리라 믿는다"면서 "나를 포함한 우리이니만큼 별반 손해 볼 것도 없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나를 안다고 하지 마세요'의 화자는 날다람쥐나 청설모 쯤 되는 설치류 동물이다. 상수리 열매를 긴 앞니로 갉아먹는 귀여운 모습만 떠올리게 되는 녀석들은 실상 겨우 눈을 뜨는 새끼 새도 잡아먹는다. 심아진은 짧은소설 말미마다 '흐르는 말'이라는 문패를 붙여 간단한 멘트를 부기하는데, 이 작품에는 '이해는 온갖 나물을 올린 비빔밥'이며 '맛을 제대로 살리는 건 오해라는 참기름'이라고 적어놓았다.

 

"오해가 개입되지 않는 건 없는 것 같아요. 다들 오해가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죠. 사실 그 오해가 없으면 사랑도 못해요. 저는 대체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면에 관심이 많아요. 겉으로 보이는 예쁜 것뿐 아니라, 그 밑으로 가면 전혀 다른 게 있을 수 있죠. 오해와도 맥이 통하는 건데, 어떤 때는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순간은 보이지 않기도 해요. 여기에 쓴 건 다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심아진은 1999년 '21세기 문학'에 중편소설 '차 마시는 시간을 위하여'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소설집 '숨을 쉬다' '그만, 뛰어내리다' '여우', 장편소설 '어쩌면, 진심입니다'를 펴내며 소설가의 길을 걸어왔다. 올 초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가벼운 인사'가 당선돼 늦깎이 동화작가로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동화도 그릇이 다를 뿐 제가 하는 이야기는 다르진 않아요. 김밥을 말고 파스타를 만들었을 때 담는 그릇이 다 다른 것처럼, 어떤 이야기에 맞는 그릇 중 하나가 동화인 거죠. 저는 기본적으로 동화는 아이들만 보는 장르라고 구획해서 쓰고 싶지 않아요. 어른은 물론 아이들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게 있어요. 소설은 장치를 구상하려면 너무 머리가 아파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걸리는 게 많은데, 동화는 그대로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신춘문예 당선작도 갑자기 여자애가 풍선이 돼서 떠오르는 이야기인데, 그게 동화라는 그릇에 딱 맞아서 이쁘게 나온 거지요."


오래 써 온 짧은소설을 묶어내면서 다른 책들과 달리 유난히 뿌듯하고 흐뭇하다는 심아진은 이번 책을  '모르는 만남' '쉬운 어긋남' '따가운 얽힘', '희미한 열림', '얕은 던져짐' 등 5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정작 '나'를 잘 모르는 상태나 가까운 연인이면서 쉽게 어긋나는 관계, 속옷처럼 편안하면서도 자주 따가운 가족, 세상과의 연대나 현실을 뛰어넘는 세계로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빼곡이 들어 있다. 정작 이 소설집 목록에는 들어있지 않은 '무관심 연습'이 표제로 뽑힌 연유는 이러하다.

 

"나는 아직도 혁명을 꿈꾼다. 젊어서라거나 지나치게 철이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내 혁명은 바깥이 아니라 안을 대상으로 하니까. 언제나 나를 전복시키는 게 유일한 목표니까. 그래서 나는 요즈음 무관심을 연습하고 있다. …나를 배제한 우리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무관심하면, 의도적으로 나를 외면하면 우리를 위한 공간이 분명 더 생기리라 믿는다.…사소한 나, 나, 나를 잠시만 묶어두면 더 큰 나, 자유로운 나, 혁명에 성공한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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