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황동규 "죽음은 삶의 앞쪽이다"

문화 / 조용호 / 2020-10-30 15:53:25
'마지막' 같은 열일곱번째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생의 끝까지 놓지 않는 삶에 대한 사랑과 낙관적 태도
'극劇서정시'와 '내 인생의 음악'에 관한 산문도 수록
"몸이 망설이다 마음 내려놓으면 죽음이 동틀 거다"

황동규(82) 시인이 열일곱번째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문학과지성사)를 상재했다. 일찍이 19세의 나이에 '즐거운 편지'로 시작해 '풍장(風葬)' 시리즈로 죽음을 희롱하고 '몰운대'에서 노닐며 60여 년 동안 시업을 이어온 그는 이번 시집이 살아서는 마지막 시집일지 모른다고 토로한다. '앞으로도 시를 쓰겠지만 그 시들은 유고집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내 삶의 마지막을 미리 알 수 없듯이 내 시의 운명에 대해서도 말을 삼가자'고 물러선다. 그는 '지난 몇 해는 마지막 시집을 쓴다면서 살았다'고 진술한다.

▲'연옥의 봄'에 이어 4년 만에 열일곱번째 시집을 펴낸 황동규 시인. 그는 "지난 몇 해는 마지막 시집을 쓴다면서 살았다"고 시인의 말을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한창때 그대의 시는/ 그대의 앞길 밝혀주던 횃불이었어./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없던 길 내고/ 그대를 가게 했지. 그대가 길이었어./ 60년이 바람처럼 오고 갔다./ 이제 그대의 눈 어둑어둑,/ 도로 표지판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표지판들이/ 일 없이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게끔 되었어./ 이제 그대의 시는 안개에 갇혀 출항 못 하는/ 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이 되었군,/ 그래도 어둠보단 낫다고 선장이 켜놓고 내린,/ 같이 발 묶인 그만그만한 배들을 내다보는 불빛,/ 어느 배에선가 나도! 하고 불이 하나 켜진다. 반갑다./ 끄지 마시라."('불빛 한 점')

 

안개에 갇혀 출항하지 못하는 조그만 배, 그 배의 선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이제 자신의 꺼질락 말락 하는 시라고 시인은 말한다. 한때는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었고, 없는 길도 만들어 나아가게 만드는 중심 푯대였지만 이젠 지척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처지라고 한숨을 쉰다. 생의 하류에 당도한 시인의 시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작은 불씨일망정 끝내 보듬고 가려는 희망의 열정 때문일 터이다.

 

"내 위층에 사는 남자가 인사를 하며 층계를 오른다./ 나보다 발 더 무겁게 끌면서도/ 만날 때마다 얼굴에 미소 잃지 않는 그,/ 한 발짝 한 발짝씩 층계를 오른다./ 그래, 그나 나나 다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들!// 그의 발걸음이 몇 층 위로 오르길 기다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집 8층까지 오르는 층계 일곱을/ 라벨의 '볼레로'가 악기 바꿔가며 반복을 춤추게 하듯/ 한 층은 활기차게 한 층은 살금살금, 한 층은 숨죽이고 한 층은 흥얼흥얼/ 발걸음 바꿔가며 올라가보자."('오늘 하루만이라도')

 

희망을 접지 않는 노시인의 자세는 여일하다. 층계를 오르는 관절의 고통을 음악으로 마취시키는 슬기는 생에 대한 의지가 선행되지 않는 한 생겨나기 어렵다. 그는 '봄 저녁에' 친구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이이가 은퇴하고도 늘 바깥일이 있었는데 지난 사흘째 도무지 말을 않고 집에 있네요." 시인은 돌아본다. "나도 화가 나서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은 적 있었지./ 그 하루 온통 하나의 절벽이었어./ 하, 어이없이 주저앉는 자신에게 그가 단단히 화났구나./ 그동안 있는 힘 없는 힘 다 내 쓰고/ 봄이 와도 물오르지 않는 마른풀 된 게 못 견디겠는 거지." 비록 마른 봄풀 신세이지만, 주저앉지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래 집콕 하다 산책을 나가 "어쩌다 지구 사람들 모두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서로서로 거리 두는 괴물들이 되더라도/ 아는 풀 모르는 풀이 함께 시멘트 터진 틈 비집고 나와/ 거리 두지 않고 꽃 피우는 지구는 역시 살고픈 곳!/ 그 지구의 얼굴을 밟을 뻔했다"('밟을 뻔했다')고 쓴다. 이 생, 이 곳에 대한 사랑이 깊다.


"나팔꽃들아 부탁이다. 마음 덜 내키더라도/ 옛정 생각해서 한 곡 불어줄 거면/ 내 삶의 마지막 악상은 밝고 또 밝게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다 된/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아팠던 일/ 같이 버스 기다리며 말 튼 이웃의 못 이룬 꿈까지/ 구석구석 불 밝혀/ 잘못 놓인 소품 하나마저 눈에 띄게 해다오./ 글 쓰다 말고 울어버린 깊은 밤들도./ 소리 죽이고 캄캄하게 울었지./ 가만, 그때 울게 한 것들 다 어디 갔지?/ 가물가물 시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창틀에 핀 꽃들이 일러줄 것 같지도 않다./ 그래 그래, 나팔 불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시간의 뭇매 더 맞고 가겠다."('나팔꽃에게')

 

바람 속에서 소멸되는 풍장을 꿈꾸었던 시인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밝고 가볍다. 시인은 '언제부턴가 내놓고 채찍 휘두르는 시간의 매질' 때문에 눈이 점점 더 어두워져 힘들어 한다. 그는 갈수록 어슴푸레해지는 생에서 짐짓 나팔꽃에게 기대보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시간의 뭇매 더 맞고 가겠다'며 물러선다. 시간은 추억의 곳간도 털어간다. "비 막 그친 공기 속으로/ 다리 얽힐 듯 질주하는 몇 마리 말,/ 목덜미 뒤로 갈기들이 펄럭인다./ 추억의 곳간에서 또 기억 몇이 도주하는군./ 눈에 밟히는 녀석도 끼어 있겠지./ 멀어져가는 말들,/ 어느 날 고개 숙이고 다시 나타나지들은 마라!"('손 놓기2')

이번 시집 뒤에는 해설 대신 시인의 산문 두 편을 수록했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시론으로 내세운 '극劇서정시'란 "연극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 시적 자아를 변모시키는, 종교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거듭나게 하는 시"라면서 "극서정시가 마련해주는 조그만 '거듭남'들을 통해 시인과 독자 들이 짊어지고 가는 삶의 짐을 별빛 무게만큼씩이라도 덜어주자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어지는 산문에서는 평생 음악과 더불어 시를 써온 내력을 말한다. 그는 "음악이 자연스레 내 시의 기틀이 되었다"면서 "음악적 흥취가 없으면 좋은 시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늦게까지 혼자 집에 남아 옛 음악이나 틀고 있을 때/ 폴 루이스가 치는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끝머리에/ 지상에 잠시 걸리는 무지개처럼 건반에 올려져/ 마시던 녹차 색깔까지 아슬아슬 떨게 하는 트릴 한 토막,/ 창밖의 별들까지 떨고 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절묘한 떨림 어디 있으랴./ 이 트릴, 혹시 별빛 가득 찬 천국의 한 토막은 아닐까?/ 별 하나가 광채를 띠고 떨며 내려온다./ 그래, 소나타도 트릴도 끝난다./ 허지만 끝남, 끝남이 있어서. 천국의 한 토막이 아니겠는가?"('베토벤 마지막 소나타의 트릴')

▲황동규 시인은 "과거의 나에게 문학은 험한 산지였다"면서 "지금은 막막한 들판, 미래는 노을 한 자락이 묻은 채 저무는 바다가 될 것"이라고 시집 말미에 붙인 산문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황동규는 고교 시절 작곡가의 길을 꿈꾸다가 자신이 발성음치라는 사실을 깨닫고 땅에 볼을 부비며 울었다고 고백한 적 있다. 그 길로 음악은 포기했으나 그의 시는 물론 생의 바탕에 음악은 지속적으로 흘러왔거니와 그는 '내 인생의 음악'으로 한 곡을 꼽으라면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이라고 산문에 썼다. 이 곡에는 유난히 피아노 소리가 떠는 듯한 '트릴'(trill)이 많이 나오는데, 그 트릴 한 토막에서 시인은 창밖의 별들까지 떨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고, 트릴 혹은 별빛 가득한 그곳을 천국의 한 토막으로 상정한다. 말미에는 깨달음, 극이 이루어지는 서정시의 반전이 기다린다. 끝이 없으면 천국도 없다는.

 

그는 "언젠가 기쁨, 아픔, 영글다 만 꿈 같은 거 죄 털리고/ 반딧불보다도 가벼운 혼불 될 때/ 슬쩍 들러붙어 하얗게 탈 빈집 처마 같은 걸 찾다가/ 내가 왜 이러지? 홀연히 꺼지기 딱 좋은 곳"('강원도 정선')을 생각한다. 비록 "50여 년 알고 지낸 이들의 이름도 가물가물/ 꽃, 새, 새소리, 동네 이름들/ 모르는 새 많이들 길 떠나갔네"('지우다 말고 쓴다')라고 자탄하지만, "어쩌다 저세상 가서도 서로 연락이 닿으면/ 오늘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뜬 날 만나자"('오늘은 날이 갰다')고 손을 흔든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앞쪽'이다.

 

"언젠가 몸이 망설이다 마음 덜컥 내려놓으면/ 그 방향에서 생판 모를 형상으로 죽음이 동틀 거다./ 혹시, 무심히 지나치던 고인돌들이/ 벌떡 일어나 배꼽춤 추는 황홀?/ 거기까지!"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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