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슬퍼하지 말아라"

문화 / 조용호 / 2020-12-25 13:37:09
뒤숭숭한 연말, 오래 익은 시의 향훈으로 가슴 덥히는 시집들
첫 시집 복간 문학동네 '포에지', 문학과지성 '디자인 페스티벌'
오래 된 시 다시 손보기도 하고, 시집 디자인 혁신 새로움 선사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보고 싶고 봐야 하는데 절판된, 종이에 박힌 활자로는 더듬을 수 없고 인터넷 세상에서만 떠도는, 그런 오래된 시집들이 있다. 어떤 이들에겐 지나온 시절의 정서를 환기시키고, 시를 공부하는 '문청'들에겐 교과서처럼 읽힐 수 있는 그 시집들이 새로 출간되고 있다. '문학동네'에서 '포에지' 시리즈를 내놓기 시작했고, 문학과지성사는 복간 시리즈와는 별개로 '문학과지성 시인선 디자인 페스티벌'이라는 문패 아래 최근 여성시인 4인의 시집을 새로운 디자인으로 선보였다. 뒤숭숭한 연말, 오래 익은 시의 향훈으로 가슴을 덥혀보자. 

▲ 북디자이너들이 새로운 해석으로 디자인한 '문학과지성 시인선 디자인 페스티벌' 시집의 주인공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최승자, 한강, 이제니, 허수경. [문학과지성사 제공] 

 
'문학과지성 시인선 디자인 페스티벌'은 최승자 허수경 한강에 이어 젊은 시인 이제니까지 4인의 시집을 개성적이고 주목받는 작업을 펼치고 있는 여성 북디자이너 김동신, 신해옥, 나윤영, 신인아가 각각 자신들만의 디자인 해석으로 선보였다. 문지시인선 표지는 오규원의 디자인과 이제하 김영태의 인물 컷으로 오랫동안 꾸려 왔다. 이번 디자인 페스티벌은 기존의 복간시리즈 'R'과 더불어 시집 디자인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는 기획인 셈이다.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최승자, '일찍이 나는') 

 

1980년대 벽두에 나온 최승자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 담긴 시들은 치명적이고 먹먹하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영원한 루머라니, 살아 있는 유령 같은 존재의 정체성이라니 헛헛하고 황막하다. 유신시절의 긴 어둠과 또 다른 항쟁으로 이어진 시대 정서는 사랑에도 깊은 멍이 들게 하고, 그렇지 않아도 상처입기 쉬운 젊은 사랑에 생채기를 덧대었다. 시인은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어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이며 "땅거미 질 무렵/ 길고 긴 울음 끝에/ 공복의 술 몇 잔/ 불현듯 낄낄거리며 떠오르는 사랑,/ 그리움의 아수라장" 속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다고 쓴다('여자들과 사내들-김정숙에게').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허수경, '공터의 사랑')


2018년 독일에서 작고한 허수경 시인은 첫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에서 세월 속에 용해되는 사랑의 운명에 대해 말한다. 세월 속에서 환하고 아픈 상처를 더듬을 수 있을 때 차마 말하지 못한 지나간 꿈을 더듬을 수 있으리라고, 공터에서 말한다. 시인은 "사랑아, 너도 젖었니/ 감추어두었던 단 하나, 그리움의 입구도 젖었니/ 잃어버린 사랑조차 나를 떠난다"('울고 있는 가수')면서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기차는 간다')라고 긴 숨을 쉰다.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한강, '서울의 겨울 12')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으면서 소설가로 더 알려진 한강은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 벅찬 사랑에 대한 기대를 노래한다. 그는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라면서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서시')라고 사랑이라는 운명에 대해 말한다.

▲ 절판된 첫 시집을 복간하는 작업으로 시작된 문학동네 '포에지' 시리즈 1차분에 참여한 시인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함민복, 김사인, 이수명, 김언희. [문학동네 제공]


'문학동네 포에지' 시리즈는 절판된 시인들의 첫 시집을 복간하는 작업으로 시작했다. 이 시리즈 앞에는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현시되는 장을 여는 일"이고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고 '기획의 말'을 붙였다. 먼저 김언희 김사인 이수명 성석제 성미정 함민복 진수미 박정대 유형진 박상수 등 10명의 첫 시집이 1차분으로 출간됐고, 김옥영 이문재 염명순 안도현 정은숙 조연호 김민정 최갑수 이영주 이현승 시인의 시집이 2차로 선보일 예정이다. 시인들은 첫 시집 내용을 수정하고 순서를 바꾸는 경우도 있으며, 초판 시인의 말에 이어 수십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재출간하는 심정을 모두 다시 부기했다. 

 

 "아버지/ 저희가 캄캄한 세상의 한 모퉁이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대의 볕으로 자란 풀과 꽃/ 성한 목숨들이 사정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개들이, 어둠 속에서 더러운 개들이/ X지를 홀딱 까고/ 아무데에나/  낄낄거리며 그걸 들이밀고 있습니다.// 어린 풀들은 소스라치고/ 차가운 시멘트 위에서/ 사금파리들은 다시 또 산산이 부서져/ 아뜩한 비명으로 하늘을 찢습니다.// 이 무량수겁 어둠의/ 추운 윗목 발치에/ 처자식 데리고 쥐새끼처럼 꼬부려 앉아/ 아아 숨죽인 제 통곡 덧없습니다."(김사인, '밤에 쓰는 편지 2- <반고문전>에 붙여')

 

1980년대 문단의 강력한 흐름을 이룬 '노동문학'의 좌장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김사인은 절제된 미학과 균형 잡힌 평론으로 당대의 감성과 이론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사인은 "부모님의 수연에 맞추어 첫 시집을 낼 수 있다니 생애에 또 한 번 있기 어려운 복"이라고 첫 시집 '밤에 쓰는 편지'(1987)에 시인의 말을 썼으나,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은  "그 시절의 울분과 설움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면서 "다만 세상에 좀 더 평화롭고 따뜻한 일들이 많아졌으면 한다"고 개정판에 썼다.

 

"나를 입고/ 나를 신고/ 나를 걸타고/ 한 입 또 한 입 나를/ 베어무는 당신/ 피 빨고 노래 빨고/ 질겅질겅 씹어 재떨이에/ 내뱉는 당신/ 온몸에 남은 푸른 이빨자국들을/ 사랑할게요 시퍼렇게/ 사랑할게요 가지 말아요/ 버리지 말아요 나의/ 기둥서방 당신/ 붙잡을 바짓가랑이도 없는 당신/ 입에서 항문으로/ 당신의 음경에/ 꼬치 꿰인 채/ 뜨거운 전기오븐 속을/ 빙글빙글빙글/ 영겁회귀/ 돌고 돌게요 간도/ 쓸개도 없이"(김언희, '늙은 창녀의 노래 2')

 

도발적인 섹슈얼리티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으로 시단에 충격을 준 김언희는 첫 시집 '트렁크'(1995)에서 "길들일 수 없는 짐승. 밤보다 더 검은 놈. 배반의 명수. 고양이는 주인을 선택한다"면서 "이 시편들 역시 독자를 선택할 것이다. ……배반하려고."라고 시인의 말 역시 도발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개정판에서도 '앤 색스턴을 빌려'서 "그때조차도 나는 내 불꽃 옷을 입고 춤추리라. 그의 독재, 절대적 왕국에게 나의 최음제로 상처를 입히며"라고 여전히 강렬하고 뜨거운 시혼을 내보인다.


'우울씨의 일일'(1990)을 다시 선보인 함민복은 "오랫동안 이북으로만 연명되어왔던 시집을 개정판으로 내게 되었다"면서 "이번 시집에는 시 해설이 들어가지 않아 시집이 너무 얇아질 것 같아 이 시집을 내기 이전에 썼던 시 열두 편을 추가했고, 시집의 색깔을 통일하기 위해 기존 시집에서 몇 편을 빼고 몇 편의 시는 교정도 좀 보았다"고 밝혔다.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해학적인 짧은 시 하나. "성기는 족보 쓰는 신성한 필기구다/ 낙서하지 말자, 다시는"('자위')

 

이수명 시인은 첫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1995)에서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 비로소 슬픔은 완성된다"고 '슬픔'을 정의했다. 이 시인도 당시 수록한  '슬퍼하지 말아라'를 이번 개정판에서 대폭 수정했다. "슬퍼하지 말아라, 저쪽에서 보면 이 길도 우회로이다. 들키지 않은 허위들을 감당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서만 배운다. 삶은 환기되지 않는 것이다"는 "슬퍼하지 말아라, 저쪽에서 보면 이 길도 우회로이다. 거미처럼 한 번에 툭 떨어져 빙빙 돌아도 슬퍼하지 말아라. 우리는 잠시 보편적 추락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떨어져내린 곳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슬픔의 안내자처럼"으로 벼렸다. '슬픔의 안내자'는 말한다. 

 

"슬퍼하지 말아라, 저쪽에서도 여기를 볼 수가 없다. 여기서도 여기를 잘 알 수 없다. 휘파람을 불며 여기를 떠나려는데 좁은 오솔길도 벗어나지 못해 허둥거린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우리가 들고 있는 선물꾸러미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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