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 동해, 시가 빛나는 바다

문화 / 조용호 / 2021-02-14 13:47:34
경북 5개 시군 배경 시 50편 골라 꼼꼼한 해설
경북 환동해 지역 역사와 문화예술 조명하고
새로 해석하기 위해 선보인 '동해 인문학 시리즈'

여행을 하면서 풍광은 물론 사람과 역사까지 가슴으로 영접할 방법은 없을까. 가장 오래 여운이 남고 깊은 인상을 간직할 수 있는 여행법 중 하나는 그 지역에 관한 문학작품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 텍스트가 소설이라면 구구절절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여행지에 대입할 수도 있겠으나, 보다 감성이 풍성하고 여백이 많은 시라면 작품이 촉발시킨 감성에다 여행자가 자신의 감상을 더 충분히 덧입히기에 맞춤하다.

경상북도 경주, 포항, 영덕, 울진, 울릉 등 5개 시군을 무대로 씌어진 시를 선별해 친절한 안내의 글을 덧붙인 '동해, 시가 빛나는 바다'(걷는사람)는 문학이 어떻게 답사와 여행에 기여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30년 가까이 문학 기사를 써 온 한겨레신문 최재봉 선임기자가 꼼꼼히 시를 골라 충실한 해설과 함께 답사 욕구를 자극한다.

▲경북 5개 시군과 연관된 시를 고르고 감상과 해설을 곁들여 현장 답사에 도움을 주는 책(왼쪽)을 펴낸 최재봉.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돌 안에 슬픔이, 금 가기 쉬운 상처가/ 들어앉아 있다/ 미소를 머금은 채// 누가 그걸 깎아 불상으로 드러내놓았을까/ 제 마음 형상 깎아내놓고 / 내 슬픔 일깨우려 기도하라는가// 나는 없고/ 이 돌만이 오래 있을 뿐/ 슬픔 앞에 불려온 이들 기도로/ 천둥 치면 어둡던 돌의 뒤가 환해진다"(이하석, '경주 남산')

 

경주 편에서 지은이는 '미소 뒤에 슬픔을 감춘' 석불에 대해 말한다. 그는 "자신의 슬픔에 이끌려 석불을 만나러 온 이들은 석불 앞에 기도를 드리고, 그 순간 천둥과 번개가 그 만남을 축복한다"면서 "사람들은 석불의 슬픔을 접하며 자신의 슬픔과 화해하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거꾸로 석불과 이름 없는 석수장이의 슬픔 역시 다독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쓴다. 

 

"해남까지 갔다가/ 너무 멀리 간 것 같아 돌아선 길/ 진주 포항 지나 영덕에 오니 해가 진다/ 생은 길고 겨울 해는 짧으니/ 오늘은 여기서 묵어 가자// 누군가 버스 뒤켠에서/ 엉덩이를 빼고 오줌을 누고 있는 터미널/ 어둑어둑한 마당을 나오는데/ 내가 절 보는 마음을 어떻게 알았던지/ 한 쪽 다리를 저는 개 한 마리/ 연신 힐끔 거리며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저것도 몸 때문에 마음을 버렸구나/ 삶아 썰면 열댓 근은 되겠다"(이상국, '영덕에서 개와 싸우다' 부분)

 

경주 남산 석불에서 '슬픔의 형제'를 느낀 지은이는 영덕에서는 이상국의 시에서 '불구의 형제'를 본다. 지은이는 "남도를 떠도는 동안 화자는 '어물쩍 나를 버려두고 왔'다고 생각하지만, 다리 저는 개의 힐끔거리는 눈빛에 그런 자신을 들켜버린 것"이라며 "추정되는 개의 근수 열댓 근과 목욕탕 욕조에 누인 제 몸 '백열 근'은 다리 저는 개와 떠도는 자신이 '불구의 형제'라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쓴다.

 

"웃음소리/ 잔잔히 들려온다./ 풍란(風蘭) 향내 묻어온다.// 너희들의 죄 없는/ 웃음소린/ 흐드러진 꽃이라 일러두자.// 잔잔한 웃음소리 속에/ 울릉도 바닷소리 겹쳐오고// 아아/ 우리들의 천국도/ 바로 저 잔잔한/ 웃음소리 속에 있다."(신석정, '울릉도 얼굴들')

지은이는 "이 시에서 울릉도는 일종의 천국"이며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시인 신석정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사회를 '그 먼 나라'라고 하여 거리감을 강조한 표현으로 지칭한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아마도 울릉도가 한반도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신비감을 준다는 지리적 입지가 작용한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짓겠네// (…) //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위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김명인, '너와집 한 채' 부분)

 

울진이 고향인 김명인의 시를 두고는 "그 너와집에서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비현실적이지만 매혹적"이라며 "도회에서 꾸려 온 기존의 관계와 의무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은 실종과 잠적을 향한 의지로 표출되거니와, 사라진 지명 '강원남도'는 그런 실종을 완성시키기에 제격"이라고 본다.

▲동해 인문학 시리즈로 출간된 책들.


"나 오늘 기필코/ 저 슬픈 추억의 페이지로 스밀라네/ 눈 감은 채 푸르고 깊은 바다/ 흉어기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목단꽃 붉은 이불을 덮고 / 왕표연탄 활활 타오르는/ 새벽이 올 때까지/ 은빛다방 김양을 뜨겁게 품을라네/ 작은 창 가득/ 하얗게 성에가 끼면/ 웃풍 가장 즐거운 갈피에 맨살 끼우고/ 내가 낚은 커다란 물고기와/ 투둘투둘 비늘 털며/ 긴 밤을 보낼라네"(권선희, '매월여인숙' 부분)

 

포항 지역에서는 "구룡포가 시인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권선희 시인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며 "선배 시인 김윤배가 '내 안에 구룡포가 있다'라는 시를 쓰기까지에는 권선희 시인의 이 시 '매월여인숙'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전한다. 지은이는 "여인숙 허름한 방에서 '내가 낚은 커다란 물고기'는 비늘을 파닥이며 청어 같은 생명력을 과시"한다면서 "어부는 고기잡이를 쉬지 않는다!"고 경탄한다.

이들을 포함해 경주(박목월 이근배 유안진 정호승 백무산 정일근 조용미 장석남 김은경), 영덕(이색 문인수 김명수 차영호 김만수 손진은 오태환 김동원 이종암), 울릉(유치환 오세영 이동순 편부경 강문숙 안상학 이정록 이영광 황규관), 울진(허만하 신경림 황동규 김영무 권경인 이종주 안도현 남효선 김명기), 포항(이육사 김윤배 송기원 이시영 이원규 강영화 함순례 손창기 이소연) 편에 모두 50명의 시와 해설이 수록됐다. 최재봉은 "이 책은 독자들이 답사 현장에서 시와 감상을 읽으며 여행의 감흥을 더 진하게 맛볼 수 있게 하고자 했다"면서 "시를 고르고 감상과 해설을 곁들이면서 새삼 느낀 바, 이 땅 곳곳에는 가야 할 곳이 널렸고 그 장소들을 노래한 시들도 풍성하다"고 책머리에 썼다.

이 책은 경상북도 환동해지역본부와 도서출판 '걷는사람'이 경북 환동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조명하고 새로 해석하기 위해 선보인 '동해 인문학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됐다. '동학의 땅 경북을 걷다'(신정일), '노래 따라 동해 기행'(이동순), '숨과 숨 사이 해녀가 산다'(권선희), '잠녀(潛女) 잠수(潛嫂) 해녀(海女)'(이동춘) 등이 지금까지 출간된 이 시리즈의 목록이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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