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자신만의 슬픈 눈으로 풍경을 증언하라"

문화 / 조용호 / 2021-03-26 09:22:43
자서전 '산돌 키우기' 펴낸 소설가 한승원
유년기부터 노년까지 시간의 굽이굽이
문학 뿌리 더듬는 서사시 같은 에피소드
"기어이 꽃을 피운 글쓰기는 그의 종교"

소설가 한승원(82)이 자신의 삶과 문학의 뿌리를 담은 '산돌 키우기'(문학동네)를 펴냈다. 등단 이래 55년 동안 줄기차게 써온 소설이 아니라, 직접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삶의 세목들을 짤막한 에피소드 중심으로 두툼하게 구성한 자서전 형식이다. '살아 있는 한 쓸 것이고, 쓰고 있는 한 살아 있을 것'이라고 되뇌어 온 그가 '마지막 진술'이 될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책이다. 한승원의 소설들을 죽 따라온 독자들이라면 이미 친숙한 이야기들도 적지 않지만, 그의 문학이 배태된 맥락을 따라 전개되는 유년기부터 노년에 이르는 삶의 여정은 흥미로운 산문 서사시처럼 다가온다. 한승원 문학의 뿌리에 방점을 찍은 자서전 형식의 소설론이기도 하다.

 

▲자서전 형식으로 문학의 뿌리를 들여다본 소설가 한승원.  그는 "마지막 진술이 될지도 모르는 이 책은 내가 이야기를 통해 삶의 빛을 얻고, 순전히 이야기의 힘으로 살아왔음을 증명한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설가는 '이야기의 힘'으로 살아간다. 모든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부터 구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윤리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는 신통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평생 동안 내 삶을 지배하고 나를 구제했다. 역설은 진리를 도출하는 기묘한 언술이고, 반전은 업어치기처럼 뒤집어 메어침으로써 독자를 깜짝 놀라 깨닫게 하는 마술적인 가르침이었다."

 

한승원에게 이야기의 힘을 어렸을 때 자연스럽게 가르쳐준 스승은 할아버지였다. 그는 '할아버지 방에서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와 옛날이야기와 모질게 힘을 써서 뀌는 방귀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고 술회한다. 우리 민족의 설화 전설 속에 깃들어 있는 도깨비에 대한 할아버지의 해석은 독특했다. 할아버지에 따르면 '도깨비는 기묘한 성정을 가진 족속'으로 '암수를 불문하고, 평생 동안 십대 청춘들처럼 피가 끓기 때문에 성정이 감당할 수 없도록 산만'하며 '도깨비는 비이성적인 존재, 감성적인 존재'라고 했다. 한승원은 어른이 된 다음 자신 안에 도깨비를 닮은, 어둠 속에서 힘이 넘치는 무언가가 들어 있음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 도깨비야말로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게 만드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의 상징일 터이다.

 

장흥 바닷가 마을에 살았던 그는 읍내에서 자취하며 중학교를 다녔다. 집까지는 팔십 리가 넘는 길이었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어 그는 주말이면 그 길을 걸어서 왕복했다. 그는 '곡식 자루를 짊어지고 반찬 단지 하나를 들고 땀 뻘뻘 흘리며 가파른 재를 넘기도 하고 차가운 냇물을 맨발로 건너기도 하고, 산모퉁이를 돌기도 한 그 한 걸음 한 걸음'에도 소설을 대입한다. '소설은, 참을성 있게, 이 앙다물고 쓴 섬세한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이 모여 짜여지는 것이다. 단 한 자의 오자나 탈자가 있어도 안 되고, 오롯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그 단어와 문장들은 팔십 리 길을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걸어가는 소년의 한 걸음 한 걸음하고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는 이어 말한다.

 

"차 타고 가면 보이지 않는 것이, 걸어가면서 보면 보인다. 들꽃 한 송이, 팔랑거리는 나비, 다람쥐, 새 들이 보인다. 구름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산도 보인다. 길 가장자리에 서 있는 전주 한 개와 다가오는 또 한 개의 사이를 칠십 걸음쯤에 돌파해가듯이 문장이란 것도 대상의 형상화를 위해 섬세하고 끈질기게 서술(돌파)해 나가는 것이다. 소설가들은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이를 앙다문다. 불도저로 밀고 가듯이 쓴다. 긴장하고 쓰기 때문에 심장과 위장이 압박을 받는다. 그렇게 쓴 소설 한 편은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던지는 한 개의 질문이다. '참된 삶이란 것은 이런 것 아닐까요' 하는 원초적인 질문."


 소설가는 도덕 교사도, 설교자도 아니지만 인류 최고의 윤리 교사라고 생각하는 그는 모든 소설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윤리의식이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작품의 도달점은 향기로운 아름다움과 철학이나 종교와는 다른 구원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자서전이 소설론을 앞세우는 건 아니다. 한승원 문학을 구성해온 삶의 주요 대목들을 흥미롭게 진설하면서 전개된다. 한승원 문학을 배태한 중심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소를 몰고 쟁기질을 하고, 바다에서 김 양식을 하며 밤배를 저어 쌀가마니를 나르던 노동이 자리잡고 있다. 이 시기의 에피소드들은 신춘문예 당선작 '목선'의 자양분이 됐고, 이후 그의 문학이 바다와 갯벌을 무대로 토속적인 정한과 우주의 율동으로 이어지는 뿌리가 되었다.

 

여인들 이야기도 흥미롭다. 고등학교 시절 자취할 때 하룻밤에 다 읽어야 하는 책을 나눠보던 여학생은 교사가 되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청년 한승원을 떠났다. 배신감과 상처는 청년에게 오기를 발동시켰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 대학에서 김동리에게 소설을 제대로 배웠고, 미당에게 촉기 넘치는 시 강의를 들었다. 군대 시절 그를 보살펴준 대학 동기 여학생은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면서도 냉기어린 '살' 때문에 맺어지지 못했다. 후일 군인의 후처가 됐다가 그 여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셋방을 전전하며 형제들 여섯의 삶을 일일이 뒷바라지 했던 한승원에게 아내는 '냉기'의 반대쪽에 있는 생명력 넘치고 다감한 헌신적인 여인이었다. 교사 시절 예쁜 제자였던 여성은 비구니가 됐다가 한 남자를 구원하기 위해 환속했지만 남자는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한승원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모티브가 됐다. 

 

한 영혼을 구제하려고 들었던 그녀의 슬픈 사연은 해결해주지 않으면 안 될 숙제로 그의 영혼을 오랜 동안 억눌러서, '반야바라밀다심경' 끝부분에 나오는 '아제아제바라아제'(가자 가자 더 높은 곳으로)를 표제로 삼아 불교 잡지에 연재했다. 시나리오까지 직접 써달라고 임권택 감독이 청했고,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받은 이 영화로 '책이 한없이 팔렸고 원작료와 인세는 가난한 살림의 허리를 펴지게 했다'고 그는 돌아보았다.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하며 젊은 독자들에게는 아버지보다 더 유명한 소설가 딸 한강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어디론가 사라져 찾다보면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공상을 하면 안 되느냐고 되물었다는 딸이 세상에 나왔을 때 모습에 대한 아버지의 다감한 묘사. '아기는 얼굴이 예쁘장한데, 피부가 약간 가무잡잡했고 이국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마가 여느 아이와 다르게 내밀기 때문에 눈이 약간 들어가는 느낌이었고, 속눈썹이 유난히 길면서 위쪽으로 휘어진 듯싶기 때문에 눈동자가 하늘 호수처럼 깊고 그윽하고 맑아보였다.' 한승원은 "그 딸이 내놓곤 하는, 나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에 놀라면서, 세상에 대한 나의 시각을 교정하곤 한다"고 전한다.

 

▲1997년 서울살이를 접고 내려와 장흥군 안양면 '해산토굴'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살아온 한승원. 그는 이곳이 '극락'이라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어떤 경우에도 문학을 삶 앞에 두지 않겠다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반짝이는 석영 같은 이 페이지들 사이를 서성이고 미끄러지며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얼마나 척박한 흙을 밀고 그가 기어이 꽃피었는지. 그걸 가능하게 한 글쓰기가 그의 종교였음을. 그토록 작고 부드러운 이해의 순간이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아버지 자서전 말미에 발문을 보탠 딸은 "입원과 재입원을 거듭한 뒤 길고 더딘 회복기를 통과하는 동안 아버지는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하고 우울해지셨는데, 글쓰기와 함께 힘차게 되살아나셨다"면서 "이 책의 원고를 읽으면서야 그 되살아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아버지는 아들과 딸에게 당부했다. "너희들 자신만의 독특한 슬픈 눈을 지니도록 하여라. 그 눈으로 너희들의 눈에 투영된 풍경을 증언하도록 하여라."

자서전 제목에 언급한 '산돌'이란 산에서 캐온 자줏빛 석영을 말하거니와, 어린 시절 그 돌을 땅에 묻어놓은 뒤 좋은 행실을 보이면 자라난다고 믿었던 에피소드에서 빌려온 것이다. 한승원에게 '산돌'이란 그를 구원으로 이끈 소설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한 생을 바쳐 키워온 그 빛나는 돌은 세상의 어둠 속에서 얼마나 자라 있을까.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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