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모든 軍대북공작 국정원이 조정·통제했다

정치 / 김당 / 2021-05-31 15:55:12
[김당의 시크릿파일Ⅱ] 정보사 북파공작 국가범죄와 흑역사 7
중정, 1.21사태 이후 '전선공작' 부대와 별도의 응징보복 특수부대 창설
육군 선갑도 수인(囚人)∙공군 실미도 오소리∙해병대 마니산 까치부대

UPI뉴스는 국가정보원이 군(軍) 정보기관의 공작활동을 조정∙통제하는 '군 공작활동 조정규정'(대통령령과 국정원 규정)에 근거한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을 입수해 그 일부 내용을 공개한다.
 

▲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군 정보기관인 국방정보본부, 육군 정보사, 해군 정보부대, 공군 정보부대에 배포한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 통보'의 일부.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은 중앙정보부 창설 직후인 1964년애 처음 제정돼 안기부를 거쳐 현재 국정원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1968년 1.21사태를 계기로, 50년대부터 '전선공작'을 벌여온 육군 첩보대(HID/AIU)의 북파 공작대와는 별개의 응징보복 특수부대를 운영해온 사실은 관련자들의 증언과 일부 국회의원과 과거사진상조사위원들의 국정원 비밀자료 열람 등을 통해 확인된 바 있다.

 

하지만 국정원이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이란 비밀문서를 통해 군 정보기관들의 공작활동을 조정∙통제해온 사실과 군 공작활동의 구체적 내용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UPI뉴스는 이 문건이 기밀(Ⅱ급비밀)로 분류돼 있지만, 통상적인 비밀 보존기한인 30여년이 지났음을 감안해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그 내용을 일부 공개한다.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 통보'라는 제목의 이 문건은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육군 참모총장(수신)과 육군 제5616부대장(참조)에게 보낸 것이다. 제5616부대는 1980년대 당시 육군 정보사령부의 대외 명칭으로, 이후 '818계획'에 의해 1990년 11월 해∙공군 첩보대와 함께 현재의 국군 정보사(제9965부대)로 통합되었다.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과 '19○○(해당연도) 군 공작활동 지침' 등을 A4 용지에 타이핑한 이 문건은 41쪽 분량이다. 배포선은 △3국 1단(원본 보관) △기조실 △국방정보본부 △육군정보사령부 △해군정보부대 △공군정보부대 등 6곳으로 돼 있다.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의 대북 응징보복 작전 '330계획'

 

▲ 1983년 10월 9일 폭탄테러 직전에 아웅산 묘역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수행장관들의 마지막 모습. 아웅산 테러 사건을 계기로 군은 대북 응징∙보복 계획인 '330계획'을 수립했다.


원본의 생산∙보관처인 '3국 1단'은 당시 안기부 편제상 대북공작국 중앙(군) 공작단이다. 배포처 중의 하나인 국방정보본부의 비고란에는 '330계획 관련 사항'이라고 기재돼 있는 점이 눈에 띈다. '330계획'은 북한의 아웅산 테러 사건을 계기로 안기부와 군이 마련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의 부호명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역에서 북한 공작원이 미리 설치해 놓은 폭탄이 터져 서석준 경제부총리와 이범석 외무장관 등 공식수행원과 기자를 포함해 17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폭탄 테러 사건이다.

 

동남아시아∙오세아니아 순방길에 올랐다가 첫 방문지인 미얀마에서 간발의 차이로 참사를 모면한 전두환 대통령은 사건 당일 모든 순방계획을 취소하고 귀국해 비상경계태세를 발동했다. 전국적으로 '북괴 만행 규탄대회'가 열리고 보복과 응징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5공 수뇌부는 북한에 대한 강력한 응징·보복책 수립을 군에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수립된 응징∙보복 계획인 '330계획'에는 북한군의 핵심 전력인 AN-2기를 운용하는 5아군의 특수부대를 공중 침투시켜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과 북한 체제의 상징인 주체사상탑,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 등을 폭파하는 작전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330계획에 따라 당시 육군 제5616부대와 공군 '25전대' 특수전 조직은 평양 시가지 모형을 만들어 놓고 벌이는 모의훈련을 거쳐 평양 잠입과 보복작전을 위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실시했다. '330계획'도 훈련은 군 소관이지만 작전 개시와 종료는 군 공작활동을 조정∙통제하는 권한을 가진 안기부장의 지휘통제를 받았다.

 

하지만 330계획은 실제 이행되지는 않았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가 리처드 워커 주한 미대사 등을 통해 보복공격을 자제해 달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안기부장은 외교관 출신의 노신영 전 외무부장관이었다.

 

대북 첩보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인 '제5616부대'는 이후 1988년 8월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사회부장 테러 사건으로 처음 부대명이 구설에 오른 바 있다. 당시 이 사건으로 테러를 지시∙은폐한 이규홍∙권기대 준장 등 7명이 구속되고 이를 묵인한 이진백 사령관(육군 소장)은 직위 해제되었다.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 보니 군의 모든 공작이 국정원 조정 대상

 

▲ 1968년 1.21사태 이후 그해 5월 30일 중부전선 남방한계선을 시찰하는 가운데 신형 저격용 소총을 겨눠보는 박정희 대통령 [정부기록사진집]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에는 조정의 근거로 △대통령령 제10239호(81. 3. 2) 정보 및 보안업무 기획∙조정 규정과 △국가안전기획부 규정 제827호(83. 11. 2) 군 공작활동 조정 규정을 적시했다.

 

'정보 및 보안업무 기획∙조정 규정'은 중앙정보부 창설 당시부터 도입된 규정이다. 1961년 6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법과 함께 공포된 중앙정보부법의 제1조(기능)는 이렇게 돼 있다.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되는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 정보수사활동을 조정감독하기 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 하에 중앙정보부를 둔다."

 

중앙정보부 창설자인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국가의 새 질서를 만들려면 무서운 데가 하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중앙정보부법을 제정했고, 그 법의 핵심은 정부 각 부처 정보수사 활동의 조정∙감독과 수사권이었다고 강조했다.

 

중앙정보부법 제정 초기에는 시행규칙 없이 모법에만 규정된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 정보수사활동을 조정감독' 권한은 군정이 종료된 이후인 1964년 3월에 '정보 및 보안업무 조정·감독 규정'(대통령령 제1665호)으로 처음 제정되었다.

 

법령 제정 당시는 '조정∙감독 규정'이었으나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된 가운데 정보 및 보안업무가 관계기관의 협의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법령도 '기획·조정 규정'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하지만 국정원으로 개편된 이후 현재까지 기획∙조정 권한은 변함이 없다.

 

실제로 현행 '정보 및 보안업무 기획∙조정 규정'(대통령령 제28211호, 2017년 7월 시행)은 국정원장 기획업무의 범위를 1. 국가 기본정보정책의 수립 2. 국가 정보의 중∙장기 판단 3. 국가 정보목표 우선순위의 작성 4. 국가 보안방책의 수립 5. 정보예산의 편성 6. 정보 및 보안업무의 기본지침 수립 등 여섯 가지로 정해 놓고 있다.

 

앞서의 '군 공작활동 기존지침'(Ⅱ급비밀)은 바로 6항의 '정보 및 보안업무의 기본지침 수립' 규정에 따른 것이다. 즉, 중앙정보부 시절에 제정된 '정보 및 보안업무 조정·감독 규정'이 안기부를 거치면서 '기획∙조정 규정'으로 바뀌었을 뿐, 군 공작활동에 대한 조정∙통제권은 변함없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군 공작활동 기본지침'에 따르면, 군 공작활동 조정 사항은 △제3국을 통한 우회공작 활동 △역용 및 이중공작 활동 대북 침투공작 활동(게릴라 활동 포함) △공작 장비의 개발 및 각 기관과의 지원 협력 △우방 공작기관과의 합동공작에 관한 사항 △공산국가에 대한 침투공작 활동 △기타 안기부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공작활동 등이다.

 

우회∙역용∙이중∙침투공작 등 공작 유형이 다 포함된 가운데 '기타 안기부장(국정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공작활동'까지 포함돼 있어 사실상 군의 모든 공작이 다 국정원의 조정 대상인 셈이다.

 

또한 안기부장의 '조정 절차'를 규정한 내용을 보면 △승인 사항(중장기 및 년간 사업계획, 공작계획 및 종결, 거점 설치 및 폐쇄) △통보 사항(공작원 파견 및 귀환, 대북 침투공작, 특수첩보 및 상황 발생시, 월별 공작 현황) △사전 조정(우방국 합동공작) △필요시 직접 조정(대북 침투공작) 등으로 세분화돼 있다.

 

국정원, 촘촘한 그물망으로 군 공작 통제…기관간 충돌, 남북간 전면전 방지

 

▲ 해병대 북파공작대 'MIU부대'(일명 마니산 까치부대)는 봄에는 평양시내에 잠입했을 경우 피신과 생존을 위해 1주일 간 하수구에서 생활하는 생존훈련, 여름에는 고무보트(IBS)를 이용한 해상침투훈련, 가을에는 공군 첩보부대에서 공수훈련, 겨울에는 대관령에서 스키훈련을 받았다. [해병넷 캡처]


사전 승인, 사전 통보, 사전 조정, 필요시 직접 조정 등의 촘촘한 그물망으로 군 공작을 철저히 조정∙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선진 정보기관에서도 작동되는 이런 조정과 통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우선 정보∙보안업무의 특성상 유일한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이 부문(군) 정보기관들(국방정보본부, 정보사, 경찰 보안수사국 등) 간의 업무 충돌과 중복에 따른 예산낭비를 막기 위해 관련 법령에 따라 조정∙통제하는 것이다.

 

또한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한 조치이기도 하다. 군이 정부의 조정∙통제 없이 독자적으로 '특수사업'(북파 무장공작)을 하면 북한과의 적대행위에 따른 전면전 위험이 크기 때문에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의 공작단장이 각 군의 '특수사업'을 조정∙통제하도록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1.21사태를 계기로 육∙해∙공군에 별동대 개념의 특수부대를 창설해 운용한 것이다.

 

남북한은 6.25 한국전쟁 시기부터 쌍방 간에 '전선공작'이라는 부른 크고 작은 무장 침투작전을 전개해왔다. 전선공작 또는 당야(當夜)공작은 '무장공비'로 불렸던 북측의 무장침투에 대응하는 보복응징과 함께 전선지역에서의 전술첩보를 수집하기 위한 공격 형태로 이뤄졌다.

 

지금은 첩보위성과 무인정찰기로 할 일을 그때는 사람을 보내 직접 전술첩보를 확인했던 것이다. 다만 남북한의 차이가 있다면, 북한군의 무장공작이 후방침투 성격을 띠고 있었던 데 비해, 한국군의 무장공작은 주로 군사분계선 인근의 북한군 대대·연대본부 등을 파괴하는 5~10명 단위의 임무가 많았다는 점이다.

 

1.21사태 계기로 육∙해∙공군에 별도의 응징보복 특수부대 창설

 

▲ 1.21사태 직후인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 창설식에서 행진하는 여성 향토예비군  [정부기록사진집]


특히 1967년 이후 북한이 대남 게릴라전을 위한 특수부대를 창설해 군사분계선에서의 기습공격과 무장 게릴라 침투를 증가시키는 가운데 1968년 1.21사태가 터졌다. 1.21사태는 군 복무기간 연장과 향토예비군 창설, 주민등록제 시행 등 국민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가운데 국가안보와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1월 26일 청와대에서 전국 군∙검∙경과 중앙정보부, 청와대∙정부∙여당의 수뇌부가 참석한 긴급 합동안보비상회의를 열어 독자적인 대북 응징보복계획을 수립해 추진하라는 지침을 하달했다. 당시 정부와 군의 수뇌부는 북한 특수부대가 대통령 거처인 청와대 지척까지 침투한 것에 대해 응징보복을 해야 침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강경 분위기 일색이었다.

 

이에 따라 군 공작활동의 조정∙감독권을 가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1월말~2월초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사령관을 긴급 소집해 "우리도 김일성 거처와 김신조 부대(124군부대)를 습격할 수 있는 특수부대를 창설해 비행기로 고공침투해 폭탄으로 때려부숴야 한다"고 지침을 제시했다.

 

김형욱은 아울러 초대 육군 첩보대(HID) 대장 출신으로 중정의 대북 공작책인 이철희 1국장(국제정보국장)을 불러 대통령 지침에 따라 각 군에 하달한 특수부대 창설계획을 기획∙조정∙감독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각 군은 특수부대 창설을 위한 '특수공작대'를 설치하고 책임공작관을 선임해 '특수공작 기본공작계획서'를 중앙정보부에 상신해 김형욱 부장의 재가를 받아 추진하게 된다. 당시의 결재 라인은 김형욱 부장—이철희 제1국장—윤진원 단장으로 이어졌다.

 

군 공작활동을 통제한 윤진원 공작단장은 이철희 국장과 함께 HID 출신의 현역 대령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해 50년 12월 소위로 임관해 HID에서 근무하다가 61년 중앙정보부가 창설되면서 현역 소령으로 중정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HID와 중앙정보부를 잇는 대북공작의 산증인인 이철희-윤진원 콤비는 대북공작 또는 해외 우회공작 업무를 담당해오다가 1973년 정권 안보를 위한 정치공작인 'KT공작', 즉 김대중 납치 공작에 가담하게 된다.

 

국정원 과거사진상조사위가 열람한 'KT사건 행동별 관여인사 일람표'에 따르면, 김대중 납치사건의 최고책임자는 이후락 부장이었으며, 지휘보고 라인은 이철희 정보차장보―하태준 해외공작국장(8국장) ―윤진원 8국 공작단장―김기완 주일공사 등으로 이뤄졌다.

 

도쿄에서 납치 현장을 지휘한 베테랑인 윤 단장은 현장에 마약류와 북한 담배(백두산) 흔적을 남겨 놓아 일본 야쿠자와 조총련계 북한 공작원이 연계된 것처럼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했으니 주일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현장에 지문을 남기는 바람에 중앙정보부 공작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윤 단장은 납치사건 이후 공작에 가담한 중정 직원과 용금호 선원들의 비밀관리를 맡는 등 일선에서 소외된 업무를 하다가 결국 75년 준장 진급에 실패하고 전역했다. 중1 때 부친을 따라가 일본을 거쳐 미국에 정착한 '성 김'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바로 김기완 공사의 아들이다.

 

▲ 1.21사태를 계기로 창설된 공군 2325부대(OSI) 209파견대, 일명 실미도 오소리부대원들(오른쪽)과 이들의 비극적 실태를 극화한 영화 '실미도' 포스터


결과적으로 기존의 전선공작을 전개해온 육군 첩보대(AIU)는 1.21사태를 계기로 북한의 124군부대에 대응해 기존 부대를 통합∙개편해 설악개발단 909대(약칭 '개발단')와 청계산80부대(위장명칭 '대성목장')를 두 축으로 체계적으로 운용하게 된다.

 

또한 1.21사태를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김형욱 중정 부장—이철희 대북공작국장—윤진원 대북공작단장으로 이어진 대북 침투공작 지침에 따라, 한국의 첫 수인(囚人)부대인 육군 첩보대 902부대 803대(선갑도 부대), 해병대 특수수색 503대(MIU, 마니산 까치부대), 공군 2325부대(OSI) 209파견대(실미도 오소리부대)가 창설된다.

 

육∙해∙공군에 1개씩 창설된 세 부대는 기존의 전선공작이나 전술첩보 수집 등이 목적이 아니라, 북한 정권의 핵심부를 응징보복 공격하는 사실상 '자살특공대' 성격을 띤 특수부대들이었다. 실제로 해병대 까치부대를 제외하곤 별도의 복귀훈련을 받지 않았다.

 

((다음에는 관련자의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세 부대의 구체적인 창설∙훈련∙해체 비화가 이어집니다))

U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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