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실미도부대, 옥천(7명)뿐 아니라 파주(7명)서도 집단 포섭

정치 / 김당 / 2021-06-07 11:32:04
[김당의 시크릿파일Ⅱ] 정보사 북파공작 국가범죄와 흑역사 8
공군이 중정에 제출한 '공작원 모집결과 보고서'(68. 4. 14) 등 확인
이원적 지휘구조∙부대관리 방치, 기간병∙공작원 갈등 커져 '자폭'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 1.21사태 직후인 22일 새벽 생포된 김신조(왼쪽 사진)가 작전본부가 설치된 홍제파출소로 들어서고 있다. 김신조는 이후 방첩대의 신문과 기자회견, 6군단 관내의 무장공비 시신 확인 등으로 끌려다녔다. [국가기록원 제공]


1950년대부터 육군 첩보대(HID, 61년부터 AIU)의 전선공작 위주로 전개해온 군(軍)의 북파 무장공작은 1968년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1·21사태를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1·21사태 당시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당시 27세)의 충격적인 발언이 그 신호탄이었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직속의 특수부대 '124군 부대'의 무장공작원 31명이 청와대 코앞까지 진출한 이 사건과 김신조의 육성은 정권 핵심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윤필용 당시 방첩부대장은 김신조를 심문해 이들의 침투목적이 박정희 대통령을 '까부수기'(암살) 위한 것임을 파악했다. 방첩대는 곧바로 124군 부대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김신조에게 북한 전역에 걸친 부대 위치와 훈련받은 부대의 위치 및 건물 요도를 그리게 했다.

 

김성은 당시 국방장관은 이 그림을 갖고 본스틸 유엔군사령관을 만났다. 항공촬영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김신조가 그린 건물 배치도는 오산비행장에서 이륙한 미군 SR-71 첩보기가 촬영한 항공사진과 대조해보니 정확히 일치했다.

 

박정희는 1·21사태 직후 1월 22일부터 2월 19일까지 준전시상태에서 비상시국대책회의 및 군 수뇌부 회의 등 총 14회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게다가 1월 23일에는 원산 앞바다에서 정찰 중인 미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나포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대북 응징보복을 해야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강경론이 팽배했다.

 

이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사령관을 긴급 소집해 "우리도 김일성 거처와 김신조 부대(124군 부대)를 습격할 수 있는 특수부대를 창설해 비행기로 고공침투해 폭탄으로 때려부숴야 한다"고 지침을 제시했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군 공작활동의 조정∙감독권을 가졌다. 현 국정원도 대통령령에 근거해 군 공작활동에 대한 기획∙조정권을 갖고 있다.

▲ 1965년 10월 5일 기자회견을 하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1.21사태를 계기로 사형수 등 중범죄인을 훈련시킨 대북 응징보복부대의 창설을 주도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김형욱은 아울러 초대 육군 첩보대(HID) 대장 출신으로 중정의 대북 공작책(현역 준장)인 이철희 1국장(국제정보국장)을 불러 대통령 지침에 따라 각 군에 하달한 특수부대 창설계획을 기획∙조정∙감독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중정의 주도 아래 각 군별로 선갑도부대(육군), 마니산 까치부대(해병대), 실미도부대(공군)가 창설된 것이다.

 

장지량 당시 공군 참모총장은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 면담조사에서 "김형욱 부장이 '124군 부대를 없애는 것은 비행기로 야간 고공침투해 폭탄으로 까부수는 방법밖에 없다'며 '육군형무소에서 사형수 5~6명을 포함해 30여명의 죄수를 공급해줄 테니 공군에서 훈련시켜 달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중정이 공군에 하달한 '특수공작지시(중해아450호)'의 구체 내용은 △활공기(8인승) 개발 및 제작 △특수공작대 설치 추진의 두 가지였다. 이에 따라 공군은 특수공작 전개를 위해 대북 침투 및 첩보수집을 담당해온 기존의 20특무전대(2325부대)에 209파견대(위장명칭 오소리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서울 오류동에 있던 20특무전대는 원래 적진에 떨어진 아군 조종사를 구출해오는 특수부대로 서해 안의 여러 섬에 파견대를 운영하며 대북 첩보를 수집했다. 인천에서 뱃길로 16km 거리지만 무의도에 가려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무인도인 실미도가 선택된 배경이다. 특수전 교육과 낙하산 침투교육을 받은 20특무전대 부대원들이 먼저 훈련병(공작원)을 가르칠 기간요원(교관)으로 실미도에 들어갔다.

 

특수공작대는 '특수공작 기본계획서'에서 물색 접촉지역과 물색대상을 선정하고 공작원 회유 조건 등을 기안해 공작명 '오소리 작전'으로 중앙정보부장의 승인을 받았다. 작전명 '오소리'는 낮에는 굴에 숨어있다가 밤에 먹이를 사냥하는 오소리의 야행성 공격에서 따왔다. 당시 물색팀은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전국적으로 포섭 대상자를 물색했다.

 

당초에 1단계는 서울∙대전 우범지대의 불량배, 구두닦이 등 집단 생활자와 부산 부두 노동자, 문산∙파주 등 전방 지역이 대상이었다. 이는 집단심리를 이용해 집단의 조직원들을 한꺼번에 포섭하려는 의도였다. 2단계는 부산∙대구∙광주∙전주 지역 대공분실과 교도소의 협조를 받아 재소자 중 사형수 등 중형자들을 접촉했다. 이들에게는 형 면제 특권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기본공작계획서'에는 오소리 작전에 대해 "적진에서 포위망을 벗어나더라도 자연적 거리와 경비망의 장애로 실제 귀환은 극난의 사실"이라고 전망해 사실상 귀환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의 임무가 사실상 '자살특공대'이기에 귀환하지 못하더라도 가족이 찾지 않을 청년들을 대상으로 물색하게 된 것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당시 전국 교도소의 사형수는 120여 명이었다. 그런데 공군이 법무부에 의뢰해 보니 예기치 못한 문제가 불거졌다. 사형수는 법에 따라 형집행 이후 유가족에게 시신을 인도해야 하는데 북파 공작에 투입되면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사회적 문제가 된다며 법무부가 난색을 표시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당초의 사형수 수인(囚人)부대 창설 계획이 무산되자, 창설 시한에 쫓긴 공군 20특무전대는 대전과 의정부 파견대를 중심으로 집단 포섭을 하게 된다. 대전시와 충북 옥천, 그리고 경기 파주에서 집단 포섭이 이뤄진 배경이다. 당시 최종 선발된 '684 부대'(68년 4월 창설한 부대) 공작원 명단과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 최종 선정된 '오소리부대' 공작원 명단과 인적사항

순번

이름

주소

본적

나이

특기 및 중요 경력

사망(사인)

 

01

이부웅

경기 파주군 임진면 운천리 26

 포천

27

당수, 해병대(탈영)

실미도(피살)

 

02

윤태산

경기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

 -

25

권투, 깡패

실미도(피살)

 

03

황철복

충남 대전시 가양동 225

-

25

권투, 깡패(이명구와 친구)

실미도(자살)

 

04

이영수

경기 파주군 임진면 당동리 21

영암

31

권투, 깡패

실미도(교전)

 

05

장정길

경기 파주준 주내면 연풍리

인천

31

권투, 운전, 깡패

유한양행

 

06

임기태

경기 부천군 소래면 계수리

부천

25

전기공, 절도

유한양행

 

07

박응찬

충남 대전시 선화동 315

대전

23

이발견습생, 절도,

유한양행

 

08

정은성

경기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

이리

23

당수, 깡패 (전과3범)

유한양행

09

장성관

서울 영등포 신림동 354

부산

25

날치기, 깡패

유한양행

10

조석구

충남 논산읍 반월동 42

부여

20

합기도, 편물기계수리

실미도(익사)

11

김용환

충남 공주읍 봉항동 173

공주

20

무도

유한양행

12

전영관

충북 영동군 통산면 항공리

부산

20

마라톤, 뽕나무접사

수도병원

13

이서천

충남 대전시 정동 13

청원

29

축구, 요리사

사형집행

14

임성빈

충남 연기군 전동면 금사리

공주

22

당수(5급), 행상

사형집행

15

김창구

충북 청주시 남문로 1가 115

청주

29

써커스

사형집행

16

이명구

충남 대전시 원동 24

대전

24

당수(2급), 소매치기

유한양행

17

강찬주

서울 종로구 당주동 170의 3

제주

24

수영, 깡패, 소매치기

실미도(피살)

18

김종철

충남 대전시 성남동 35

군산

26

오토바이, 깡패, 소매치기

사형집행

19

전균

경기 파주군 주내면 연풍리

청주

-

칼 사용, 깡패

실미도(교전)

20

김봉용

충북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옥천

23

전투, 깡패

유한양행

21

정기성

충북 옥천군 옥천읍 신기리

평택

21

유도, 깡패

유한양행

22

박기수

충북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옥천

21

유도, 깡패

유한양행

23

김병염

충북 옥천군 옥천읍 가지리

옥천

22

권투, 깡패

수도병원

24

이광용

충북 옥천군 옥천읍 신기리

옥천

22

당수, 깡패

유한양행

25

장명기

충북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옥천

21

유도, 깡패

유한양행

26

김기정

충북 옥천군 옥천읍 가화리

옥천

22

당수, 통신, 깡패

조개고개

27

심보길

          - 

파주

-

구기, 깡패

조개고개

28

박원식

경기 파주군 임진면 하동

영광

32

당수, 깡패

유한양행

29

신현준

        미상

 -

-

-

실미도(피살)

30

강신옥

        미상

 -

31

구두닦이, 암표상(서울역)

실미도(치사)

31

윤석두

        미상

당진

25

-

유한양행

 

위 명단(28번까지)은 공군2325부대가 중정에 제출한 '공작원 모집결과 보고서'(68. 4. 14)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다만, 명단의 '사망(사인)'란은 기자가 사망 장소와 사인을 분류해 작성한 것임). 그래서 중요 경력 등이 실제와 다를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사실상 공작원 전원에 대해 중요 경력을 '깡패'나 범죄자로 분류한 것이다. 이는 공작원들을 훈련시키는 기간병들에게 '함부로 해도 되는 사회악'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기간병들은 훈련을 구실로 공작원들을 '인간쓰레기'로 취급했다. 또한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 이후 정부가 내놓은 '대국민 발표문'에서도 이들을 '공군이 관리하는 특수범'으로 은폐해 발표했다.

 

위 명단(28번까지)은 1968년 4월 14일 당시 1차로 선정한 28명으로, 공군은 이후 3명(신현준, 강신옥, 윤석두)을 추가로 선정해 31명으로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 부대원과 숫자를 맞춘다(신현준과 강신옥은 '실미도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68년 7월과 70년 10월경 각각 살해와 유기치사로 사망했고, 윤석두는 '실미도 사건' 당시 서울 유한양행 앞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684부대 공작원은 24명뿐이었다. 가혹한 지옥훈련과 감금 생활 탓에 이미 7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진상조사 결과에 따르면, 7명 중 1명(조석구)만 훈련 중 익사했고, 나머지 6명은 부대 이탈(이부웅∙신현준), 기간병 위협(윤태산), 민간인 강간(황철복∙강찬주∙강신옥) 사건으로 살해되거나 유기치사 되었다.

 

그런데 UPI뉴스가 '공작원 모집결과 보고서'의 인적사항과 관련 기록을 정밀 분석한 결과, 옥천뿐 아니라 파주에서도 집단심리를 이용한 공작원 집단 포섭이 이뤄진 사실이 처음 확인되었다.

 

우선 '공작원 모집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윤태산, 장정길, 정은성, 전균 등 4명이 파주군 주내면(현 파주읍) 연풍리 출신인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다가 인근 임진면(현 문산읍) 출신인 이부웅∙이영수∙박원식까지 합치면 모두 7명이 파주 출신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집단 포섭이 논란이 된 것은 옥천 출신(7명)뿐이었는데, 파주에서도 같은 인원의 집단 포섭이 확인된 것이다.

 

당시 공작원 모집은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진행했는데 파주∙문산에서 물색한 A팀의 팀장은 김응수 소령으로 나중에 김 소령은 실미도부대 파견대장(68. 4~70. 11)을 맡았다. 하지만 김 소령은 인천에 거주해 부사관인 교육대장이 사실상 부대를 지휘했다.

 

▲ 1.21사태를 계기로 창설된 공군 2325부대(OSI) 209파견대, 일명 실미도 오소리부대원들(오른쪽)과 이들의 비극적 실상을 극화한 영화 '684북파부대 실미도' 포스터 


교육대장(68. 3~71. 8)은 김순웅 상사
였다. 김 상사는 영화 '실미도'에서 '교관 최재현 준위'(안성기 분)로 각색돼 나온다. 영화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자살을 택하는 강직한 군인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교육대장실 당번병 공작원이 망치로 그의 머리를 가격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김 상사는 준위로 1계급 특진 추서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 당시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하던 박기수 공작원은 서울 영등포구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하기 전에 버스에 탄 아기엄마에게 '제 이름은 박기수'라며 '옥천 집주소로 편지를 보내달라'며 쪽지를 남겼다. 이런 뒷얘기가 나중에 신문에 실려, 이를 본 박기수의 가족이 신문사를 찾아와 수소문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옥천의 한동네(금구리) 청년 4명이 실미도 부대원으로 알려졌으나 나중에 2004년 2월 국방부 조사 결과, 옥천에서 사라진 7명 전원이 실미도 공작원으로 포섭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전과자'라는 소문이나 '깡패'라는 경력 분류와 달리, 이들은 초등학교 선후배 사이로 못배우고 가난해 돈벌이를 찾는 농촌 청년들이었다.

 

옥천 출신의 경우, 박기수가 죽기 전에 쪽지를 남긴 탓도 있지만, 같은 동네에서 한날한시에 없어진 자식(4명)을 찾으려는 가족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언론 보도를 통해 여론화가 되었다. 반면에 파주 출신 공작원의 경우, 마찬가지로 같은 동네에서 같은 인원(4명)이 한날한시에 없어졌지만 찾는 가족이 없다 보니 언론 보도도 없었다.

찾는 가족이 없는 까닭은 이들 중 상당수가 주소지가 비슷한 미군부대 집창촌이나 고아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정의 공작원 신상자료에서 본적지를 대조해보니, 옥천 출신의 경우 7명 중 6명의 본적지가 옥천(1명은 평택)이었으나, 파주 출신의 경우 7명의 본적지(포천∙인천∙청주∙이리∙영광∙영암 등)가 제각각 달랐다.

또한 이부웅 공작원의 경우, 주소지는 '파주군 임진면 운천리 26'이고 본적지가 '포천군 영북면 산정리 300'인데, 공작원 인적사항에 '포천군 영북면 운천리 26'으로 잘못 기재돼 있었다. 파주와 포천에 모두 '운천리'가 있던 탓이다.

관계자들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실미도 소대장 출신 김○○ 씨는 2005년 진상규명위에 "이영수, 윤태산, 정은성, 장정길은 입도(入島) 전부터 아는 사이로 보였다"면서 "이영수와 장정길은 함께 미군부대에 도둑질하러 들어간 적이 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실제로 입대 당시 중정 자료에 따르면 윤태산∙정은성∙장정길 3명은 동일한 주소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초등학교 선후배 관계인 옥천 출신들과 달리 이들은 실미도에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지옥의 섬' 실미도에서 부대 창설 3개월만에 생긴 첫 희생자도 파주 출신 이부웅과 출신 미상의 신현준이었다. 두 사람은 무의도에서 독도법 훈련 시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이탈해 집결하지 못하자 교육대장의 지시로 붙잡혀 와 동료들에게 맞아 죽었다.

 

두번째 희생자인 윤태산도 파주 출신이다. 윤씨는 70년 8월 무의도에서 대민지원 시 기간병을 폭행한 후 권총을 뺏아 위협한 사실이 알려져 소대장 지시로 역시 장정길 등 동료들에 의해 몽둥이로 집단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윤씨의 시신은 1년 전에 묻어둔 이부웅∙신현준의 사체와 함께 디젤유로 화장해 바다에 뿌려졌다.

 

세번째 희생자는 70년 10월경 생활을 견디지 못한 황철복∙강찬주∙강신옥이 인근 무의도에서 마을처녀 2명을 강간해 출동한 기간병들과 대치하는 과정에 발생했다. "처녀운이나 한번 대보고 자폭하겠다"며 탈영한 이들은 투항을 거부하며 자결을 기도해 황철복은 즉사했고, 강신옥은 복부중상을 입었지만 내무반에 방치해 3일 뒤에 사망했고, 자결을 주도한 강찬주는 파견대장의 지시를 받은 장정길에 의해 대검에 찔려 살해되었다.

 

1969년 11월 하순 백령도에서 대형 열기구를 통해 평양에 고공침투 하려던 계획이 중정 부장의 교체(김형욱→김계원)로 취소되면서 1년 동안 방치된 가운데 발생한 강간 사건은 1년 뒤에 폭발할 '8.23 사태'를 막을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이 사건 또한 쉬쉬한 가운데 공군 기록에는 '자살'로 처리되었다.

 

'8.23 사태'에서 생존한 공작원 4인 중 1명인 이서천(대전 출신)의 공판기록에 따르면, 이씨는 훈련기간 중 사고와 관련, "이부웅∙윤태산의 경우 장정길이 동료들로 하여금 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했다"면서 "장정길(31)이 입대 전 파주 문산에서 이부웅(27)∙윤태산(25)으로부터 괄시받은 것을 보복하기 위해 살해를 선동했다"고 진술해 눈길을 끈다.

 

훈련성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구보시 발뒤꿈치 조준 사격 위협을 당하고 '전체를 위해 제거하는 게 낫다'는 결정에 따라 저녁에 바닷가로 끌려나가 물 속에서 10분 동안 짓밟힘을 당한 전균 공작원도 파주 출신이다. 그러고도 숨이 붙어있자 백사장에 얼굴만 나오게 묻혔다가 '아침까지 죽지 않으면 살려주라'는 교육대장의 지시에 따라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전 씨는 '실미도 사건' 당일 파주 출신 이영수와 함께 기간병들과 교전 중 사망했다.
 

▲ 1968년 4월 창설 당시의 실미도 부대 조직표 [그래픽 김상선]


이처럼 사형(私刑)과 가혹행위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련생들이 1968년 5월 10일 부대 창설식에서 했던 아래의 선서가 있었다.

 

(1) 본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쇄신분골 헌신할 것과 나에게 내리는 모든 명령은 무조건 복종할 것이며, 수명사항은 절대 완수하겠습니다. (2) 본인은 입대 복무 중 고의과실을 막론하고 근무이탈은 물론 근무태만행위를 범하거나 불온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 선동 기타 부대에 해로운 일체의 행위를 자행할 경우에는 반국가행위로 간주하고 군형법상의 여하한 극형도 감수하겠습니다.…(생략)

 

실제로 생존 공작원들은 군 조사에서 '입대 후 도주하는 경우에는 본인들이 연대하여 여하한 책임도 감수하겠다'는 부대창설식의 선서에 의해 동료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또한 기간병들은 공작원 살해 이유로 '배신행위', '하극상' 등으로 설명하고, 공작원들을 무기수나 사형수 등으로 오인해 '살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공작원들에 대한 훈련 목표는 북한 124군 부대를 능가하는 기량을 갖추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론과 실습을 병행해 실미도 기지에서는 이론과 일반훈련, 인접한 무의도에서는 특수산악훈련을 받았다. 또한 공중침투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야간 낙하산 강하훈련과 기구(氣球) 탑승훈련을 받았다.

 

강도높은 훈련을 실시한 결과, 실미도 공작원들은 산악지역을 시간당 10km 이상으로 주파하고, 명중률 98% 이상의 사격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요즘 인기있는 TV 프로그램인 '강철부대'보다 더 강인한 체력과 사격술을 연마한 것이다.

 

가혹한 훈련에 대한 반대급부의 '당근책'인 대우 약속도 실미도 부대 창설식 때 입회한 공군 담당 중정 요원이 중정에 보고한 '오소리공작원 입교식 거행결과 신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입교식이라는 공식석상에서 훈련생들에게 공언한 대우 조건은 물색관들이 처음 제시한 과장된 대우 조건보다 더 큰 공신력과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입교식 당시 '중앙 유격사령부 대장 정봉수 준장'으로 속칭 마이가리 위장한 정봉선 중령(공군2325부대 공작과장)은 훈시에서 "군의 간부후보생으로 대우받고, 교육성적 여하에 따라 장차 장교로 임관"하고, "3~6개월 훈련기간에는 보수 지급 등 장교후보생으로 대우하고 외출∙외박 실시, 훈련 종료후 소위 임관" 할 것을 약속했다.

 

김신조 부대가 침투할 때 '경기도 유격사령부' 견장으로 위장한 것을 본떠 공작원들이 684부대를 '중앙 유격사령부'로 인식하도록 위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공작원들은 자신의 소속을 '중정이 지휘하는 중앙 유격사령부'로 오인했다. 실제로 공작원들은 '실미도 사건' 당일 "중앙 유격사령부나 청와대에 가서 실정을 알리고 실패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함께 자폭하자"고 결의했다.
 

▲ 정보사 산하 육·해·공군 첩보대와 중앙정보부 관할 특수공작대의 조직표. 중정과 공군의 이원화된 지휘체계가 8.23사태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래픽 김상선]


문제는 '국가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근본적 원인은 창설을 주도한 중정과 관리∙훈련을 맡은 공군의 이원화된 지휘구조로 인한 부대관리의 방치였다.

 

군 공작활동의 조정감독권을 가진 중정은 공군에 '특수공작지시'를 하달해 응징보복 특수부대 창설을 기획∙조정∙감독했다. 중정은 당시 '정보 및 보안업무 조정·감독 규정'(대통령령 제1665호)에 근거해 대북 특수부대의 설치∙운영∙폐지에 대한 포괄적인 조정∙감독 권한을 가졌으므로 월권은 아니다.

 

중정은 기획 단계부터 특수부대 창설을 지휘해 초기 부대 운영에 필요한 예산도 지원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9년 10월 중정 부장이 응징보복부대를 기획한 김형욱(63. 7~69. 10)에서 김계원(69. 10~70. 12)으로 교체되면서 실미도부대는 정권 핵심부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당시 '정치 사령부 남산'이 집중 마크해야 할 △3선 개헌(69. 10) △신민당 김대중 대선후보 선출(70. 9) △대선(71. 4) 및 총선(71. 5) 등의 굵직한 정치 일정을 감안할 때, 서해안 무인도에 갇힌 '자살특공대'는 어쩌면 손톱 밑의 때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공군2325부대의 건의로 당시 김두만 공군 참모총장이 정래혁 국방장관에게 실미도부대의 해체나 중정에의 반납을 두 차례 건의했으나 국방장관은 선거철이라 바쁘다며 건의를 밀쳤다. 훈련생들을 공군 하사로 채용하자는 신분 변경 건의도 있었으나 군고위층은 '보안'만을 걱정해 이들을 '사회 불안을 야기시킬 시한폭탄'으로 간주했다.

 

정권 핵심부의 관심과 중정의 관리∙감독이 소홀해지자 정보비 명목으로 중정→공군본부→2325부대장→공작과장→209파견대장→교육대장에게 지급된 봉급과 부대운영 경비를 중간에서 착복∙횡령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중정의 지원예산은 공작원이 31명에서 24명으로 줄고, 북파 가능성이 줄어든 가운데서도 해마다 큰 폭으로 증액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공작원 처우나 대우는 더 나빠졌고 봉급도 지급되지 않았다. 최초 3개월은 군용이 아닌 일반미와 쇠고기 등으로 양과 질에서 최고의 급식을 보급받았으나 나중에는 주∙부식이 부족해 개밥을 훔쳐먹기도 했다.

 

▲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 당시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한 684부대 공작원들이 탄 버스를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1968년 1∙21사태를 계기로 창설된 유사한 응징보복부대는 육군과 해군(해병대)에도 있었다. 그런데 실전에서 단련된 다양한 북파 공작대를 운영해온 육군(HID/AIU)∙해군(UDU)과 달리, 공군은 북파 공작대 운영 경험이 없어 기간병들과 훈련생들이 서로 융화되지 못하고 겉돈 것도 비극을 초래한 한 원인이었다.

 

수인(囚人)부대로 위장한 실미도부대와 달리 진짜 수인부대인 선갑도부대는 기존의 상설 북파 공작대처럼 장교가 팀장이 돼 공작원들과 함께 침투훈련을 했다. 반면에 실미도에서 장교와 기간병은 공작원들을 '비인간적으로 교육훈련'만 시키는 구조였다. 이들이 탈출을 모의할 때 교육대장과 기간병들을 모두 죽이기로 작정한 것도 그런 시스템 때문이었다.

 

결국 684부대의 북파 가능성이 사라지고 부대관리가 엉망인 상황에서 부대의 임무 변경이나 해체, 공작원의 신분 변경을 책임져야 할 중정과 공군이 서로 책임을 방기하는 사이에 이들은 '진짜 시한폭탄'이 되어 자폭에 이른 것이다.

 

((다음에는 육군 선갑도부대와 해병대 마니산 까치부대의 창설∙훈련∙해체 비화가 이어집니다))

U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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