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농협 '대리시험 의혹'의 깊은 뿌리

경제 / 곽미령 / 2021-06-09 17:30:45
"토요일 시간 비워놔, 10만 원 줄게." 상사의 대리시험 청탁은 이랬다. 대수롭지 않은듯 말투가 태연했다. 농협 직원 최 모(20대) 씨가 전한 청탁 당시 상황이다. 농협 승진 자격시험인 '이패스'는 토요일에 치러진다.

최 씨는 '이건 아니다 싶어' 거절했다. 후회를 남긴 선택이었다. 이후 회사 생활이 팍팍해졌다. 입사 동기의 선택이 현명했는지 모른다. "상사 부탁에 대리시험을 쳐줬다고 하더라"고, 최 씨는 말했다.

농협은 지난 5월 이패스를 화상 온라인 시험으로 바꿨다. 시험 부정을 막기 위한 제도 개선이었다. 평가 전 본인 확인, 실시간 화상 감독에다, 영상녹화까지 진행되는 방식이라고 한다. 농협 측은 "원천적으로 대리시험이 불가능한 시스템"이라고 강조했다.

제도는 앞서가는데, 의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최 씨의 고백은 제도 개선에도 달라지지 않는 지역 농협의 의식 수준을 드러낸다. 제도가 바뀌든 말든 하던대로 하는 이들이 적잖다는 얘기다.

실제로 대리시험이 치러졌는지는 알 수 없다. 농협 측은 9일 "경기지역 농협서 치러진 350건을 전수 조사했는데, 현재까지 대리시험 정황은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문제의 심각성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부하 직원에게 대리시험을 부탁하는, 그 시대착오적 인식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다.

공정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세상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한가. 불공정을 참지 못하는 20대 농협인들의 분노에 답이 있다.

"입사 후 6개월 내 불합리한 일들을 겪어도 수긍하고 융화될 수 밖에 없는게 농협", "종종 조합장 사유지에 쓰레기 주우러 가는데 조합장은 이를 당연시하고, 고맙단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가끔 기사노릇까지 한다"고 토로했다. "코로나19 시국인데도 주 2회 정도 회식은 기본이고 술취한 조합장을 집으로 모시는게 내가 이 회사에서 해야하는 중요한 업무인 것 같이 점점 느껴진다"고 했다.

이 모든 불합리한 일들은 무한반복 중이다. 아무도 이상하다고, 고치자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농협엔 폐쇄적 집단 문화가 똬리틀고 있다고 제보자들은 이구동성 외쳤다. 대리시험을 대수롭지 않게 부탁하는 의식도 이런 문화의 파편일 것이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의 인식이 좇아가지 못하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농협의 나쁜 관행, 그 뿌리가 깊어보인다.

▲ 곽미령 기자

UPI뉴스 / 곽미령 기자 ayms7@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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