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가까이 가면 보이는 견고한 삶의 실금들"

문화 / 조용호 / 2021-07-16 14:27:36
중견작가 백가흠 다섯 번째 소설집 '같았다'
윤리의 경계를 뭉개는 인간들의 어두운 내면
두 개의 자아를 오가며 부유하는 불안한 존재
"악을 상상하면서 선을 좇는 것이 정신의 승리"

코로 우는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만취한 채 졸음운전을 하다 읍내 파출소 담벼락을 전속력으로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긴 수술 끝에 살아남았지만, 얼굴 전체를 사선으로 가르는 흉터가 남았다. 그는 눈물을 잃어버렸다. 수술 후 눈물샘과 관련된 신경이 코 어딘가 연결된 모양이어서 그는 코로 울었다. 슬퍼서 울음을 참을 수 없을 때는 코에서 맑은 눈물이 흘렀다. 이 남자의 중학생 딸이 또래 아이들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코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이 남자, 딸을 잃고 저수지에 미끼도 달지 않은 낚싯대를 드리운 채 찌만 바라보며 앉아 있다. 딸을 죽인 '성우'의 엄마가 '합의서'를 품고 매일 남자 곁에 찾아온다. 성우 엄마는 아이를 그렇게 키웠으니 책임지라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린다. 남자라고 그저 불쌍한 존재는 아니다. 베트남 여자와 결혼해 딸을 낳고 살다가 이혼했는데, 엄마에게 딸을 보내지 않고 자신이 키우면서 왕따를 당해도 모른 채 술만 마시다 겨우 딸을 잃고서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는 인간이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저수지 둑에 누워 축 늘어진 '성우 엄마' 손에 꼬깃꼬깃해진 합의서를 쥐여주고 말한다.

▲인간들의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보는 단편들을 모아 새 소설집을 펴낸 백가흠. 그는 "지금 심정은 난감함"이라며 "괜찮다는데 괜찮지만은 않은 그런 느낌"이라고 썼다. [문학동네 제공]

 

'나도 사람인지라 내가 그애한테 잘못한 거 많은 거 아는데, 화풀이를 다른 데 하고 싶어지는 거요. 내 미안함과 자책감이 커질수록 분노도 커지는 거요. 죽음에 대한 보상도 받고 싶어지는 거요. 그 화를 당신에게 내야 하는데, 분을 풀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요. 내가 왜 당신에게 관대한지 모르겠는 거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말이오. 측은한 마음이 드는데, 그런 나를 발견하면 그게 또 화가 나는 거요. 그래서 안 되겠다 생각했소. 우리 힘으로 풀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나도 당신과 합의를 보기로 마음먹은 거요.'

안간힘을 써도 인간의 힘으로 풀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하기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잘잘못과 윤리를 따지는 차원을 넘어서서 세상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선택이 있을 수 있다. 중견작가 백가흠(47·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이 6년 만에 펴낸 5번째 소설집 '같았다'(문학동네)에 수록된, '코로 우는 남자'의 마지막 선택은 달랐다. 날것의 욕망으로 어두운 밑바닥을 드러내면서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윤리'의 틀을 수시로 뭉개는 군상이 이 소설집에는 가득하다.

 

'훔쳐드립니다'에 등장하는 사내의 생활은 철저하게 이중적이다. '직업도 두 개, 차도 두 대, 집도 두 채다. 둘 중 하나는 모든 게 감춰져 있고, 하나는 모두 드러나 있다. 숨겨진 삶은 안정적이고 드러난 인생은 불안정하며 피폐하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박사과정까지 마친 사내의 알려진 직업은 시간강사이지만, 실제 직업은 도둑이다. '스페셜한' 자전거로 시골마을을 돌며 도둑질을 한다. 도둑질을 마치면 자전거를 싣고 시내에 주차시킨 뒤 다시 한 시간을 걸어서 그가 사는 오피스텔로 돌아온다. 무리하지 않고 철저하게 움직이는 반경을 계산해서 신중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 직업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엉뚱하게도 그의 애인이 자신이 훔쳐온 물건을 다시 훔쳐 팔다가 꼬리가 잡힌다. 

 

표제작 '같았다'의 여자는 자주 기억을 잃는다. 깨어나 보면 싱크대 아래 쓰러져 있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 나가보면 화재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비원이 소화기를 들고 서 있다. 그렇게 여러 번 냄비를 태워먹었다. 남편과는 서로가 서로를 건드리지 않고 잘 지내온 편이지만, 관계는 아슬아슬하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 여자는 약에 취해 산다. 여자에게는 정신이 돌아온 상태와,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또 하나의 그녀가 산다. 두 개의 캐릭터로 살아가는 건 '훔쳐드립니다'의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는 의식적으로 그러하지만, 이 여자는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넘나든다. 이 여자가 밤의 포장마차에서 '그'를 만났다. 감옥을 여섯 번이나 드나들었던 남자. 그 남자가 여자를 집에 바래다주고, 여자가 원했다는 명분으로 역시 약에 취해 자고 있던 여자의 남편을 들어 올려 창밖으로 던진다. 제 정신으로 돌아온 여자는 남편이 사라진 방에서 이상한 허전함에 휩싸인다.

 

'나를 데려다 줘'의 화자는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아파트 뒷산이었다.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전부터 '기억나지 않는 망각의 밤'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와 함께 자주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사라지고, 그를 찾는 전단지가 아파트 곳곳에 나붙는다. 단지 내에서 사라진 사람은 여럿인데, 그 사내도 그중 하나였다. 주민의 신고로 사람들이 들이닥쳐 엄마의 안부를 묻는다. 엄마는 거실 유골함에 모셔놓은 지 삼 년이 넘었는데, 그가 죽은 엄마와 산다고 쳐들어온 것이다. 내내 사라진 사람들만 제시할 뿐 누가 그들에게 어떤 위해를 가했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길 따름이다. 상식적인 '나'와 불안정하고 피폐한 또 하나의 '나'라는 두 캐릭터 사이의 균열은 백가흠 단편에 자주 깔리는 주조음이다.

 

"삶이 망가져 있는데도 망가져 있는지 모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들여다보다보니 두 가지 생들이 복합적으로 교차되는 거 같습니다. 얼핏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가까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실금이 막 가 있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멀리서 볼 때는 단단하고 멋진데, 소설 쓸 때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자잘한 실금 같은 게 있는 것을 느낍니다."

 

대구 계명대 연구실에서 전화를 받은 그는 "윤리적이거나 상식적인 걸 버리고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세상이 그러한데 우리 삶이 이러저러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가장 근년에 발표한 '타클라마칸'에는 그의 이러한 생각이 선명하게 퇴적돼 있다. 대학에서 단체여행을 갈 때 실제 그곳을 답사한 뒤 집필했다는 이 단편에는 구법여행을 떠난 혜초 스님을 만나러온 '일문'이라는 승려를 등장시킨다. 

 

땡볕 아래 꼼짝 않고 성벽 아래서 수행을 하는 일문 옆에 누워서 수행하는 '중각', 빛나는 놋쇠 발우를 앞에 놓고 금품을 받는 다른 승려도 합세한다. '일문'이 오래 조금씩 파서 완성단계에 이른 석굴로 돌아가자 '중각'도 따라와 누워서 지내며 석굴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똥'을 누고, '인요'라는 승려는 일문에게 석굴을 팔라고 요구한다. 일문을 따라온 '아르파한'이라는 소녀는 비루한 승려 중각에게 훼손되고, 일문은 똥 누는 중각을 절벽 아래로 차 버린다. 석굴을 팔아 정리한 일문은 그가 온 신라 방향이 아니라 '죽음의 사막'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쓸쓸하고 아름다운, 허무가 시린 이야기다. 백가흠은 "인간의 비루와 욕망은 천 년 전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이번 소설집에는 이밖에도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 미군 병사 이야기를 통해 존재의 뿌리를 안착시킬 공간의 아이러니를 담은 '1983',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한심한 형이 아버지 죽음 이후 변화되는 모습을 통해 날것의 인간을 보여주는 '그 집', 죽은 자의 마지막 말을 수집하는 사람을 등장시킨 '어제의 너를 깨워', 소설 쓰는 자의 일상을 통해 소설보다 삶을 강조하는 '그는 쓰다' 등 모두 9편이 수록돼 있다. 백가흠은 자전적인 단편 '그는 쓰다'에서 한없이 찌질한 소설가 '소심한'을 등장시켜 문단 뒷이야기도 펼치면서, 선과 악이 착종된 어둡고 비루한 현실을 자주 들여다보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입장을 드러낸다.  

▲백가흠은 "이번 소설집을 첫 책으로 삼아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선을 좇으면서 악에 대한 상상을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 악을 상상하면서 선을 좇는 것이 정신의 승리다. 그것은 떨어져 있는 이중성이 아니라 한 몸의 양면이다.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나약한 몸, 그것이 우리의 정신이다.'

 

백가흠은 "이번 소설집에 수록한 단편들은 어떤 목적을 갖지 않고 쓴 것들"이라며 "소설 한 편 쓰려면 죽을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순간순간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은 그렇게 고귀하지 않다"면서 "삶이 훨씬 중요하고 위대하다는 마음으로 썼다"고 덧붙였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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