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6주'에 묶인 여성 인권…美 '낙태 금지' 허용 논란

국제 / 이원영 / 2021-09-03 11:27:03
연방대법원, 텍사스주 '심장박동법' 중단 가처분 기각
바이든 "수백만 여성 고통받을 것"…범정부적 대응 지시
'원정 낙태' 현실화…유사 법안 줄줄이 나올 가능성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총성은 멎었지만 본토에서는 화약고가 터졌다. 1일 심야(현지시간)에 전격적으로 나온 연방대법원발 '낙태금지' 허용 결정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을 중단해달라는 소송에 대해 5 대 4로 텍사스주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법은 현행 임신 20주 이상 낙태금지를 태아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6주로 당기는 내용(일명 심장박동법)으로 사실상 낙태금지법으로 해석된다. 임신 6주까지는 임신부가 임신을 자각하기 어렵고 병원의 진단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낙태 금지 시기를 임신 사실 자체를 모를 수도 있는 시점까지 앞당겨 사실상 낙태를 원천 봉쇄한 셈이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1973년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이다. 당시 낙태가 대부분 금지되어 있는 상태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태아가 자궁 밖으로 나와도 살 수 있는 시기(당시 22~24주) 이후의 낙태만 금지함으로써 사실상 낙태 합법화의 길을 열었다.

이 판결로 낙태를 금지·제한하는 모든 주와 연방의 법률들이 폐지됐다. 지금까지 이 판례가 기준이 되어 낙태를 금지하려는 각종 시도와 법률들이 좌초되어 왔는데 이번에 그 틀이 깨진 것이다. 

그런 만큼 파장이 엄청나다. 조 바이든 대통령부터 이번 대법원의 결정에 대해 격한 분노를 드러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 결정 바로 다음날 성명을 내고 "여성의 헌법적 권리에 대한 전례없는 공격이며 수백만 여성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범정부적 대응을 지시했다.

당장 낙태를 계획한 수많은 여성들은 인근 오클라호마, 캔자스 주로 원정 낙태를 떠나고 있다. 여성인권단체들도 들고 일어났다.

▲텍사스 주의 낙태금지법이 발효한 1일 이에 항의하는 여성들이 주의사당 앞에서 법률 철회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뉴시스]

낙태 문제는 미국의 보수, 진보를 가르는 활화산 같은 이슈로 당장 정치권은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거세질 전망이다.

민주당 간판 인물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연방대법원이 한밤중에 내린 결정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극악하고 반헌법적인 공격이며 텍사스 여성들에게 재앙을 가져온 것"이라고 강한 비난을 퍼부었다.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은 주정부가 소송을 피하기 위해 고안해낸 '꼼수'다. 법률로 6주 규정을 마련했지만 공권력이 직접 위법 행위 적발에 관여하지 않고 제소를 시민들에게 맡겼다. 낙태를 하거나 이를 방조하는 사람들을 신고하도록 하고 신고자들에게는 1만 달러의 포상금을 주기로 한 것이다. 벌써부터 '포상금 사냥꾼'들이 양산될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다.

시민이 신고를 하고 낙태 처벌 여부는 법원 판단에 맡기겠다는 것이어서 향후 법원은 개별 사안에 대해 일일이 재판을 하면서 케이스에 따라 처벌의 기준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으로 법조계에서는 우려하고 있다.

텍사스를 전례로 삼아 유사한 낙태금지법안이 줄줄이 나올 가능성도 높다. 올해 들어 텍사스주처럼 임신 6주 이후 낙태 금지를 추진하는 주도 15곳에 달한다. 현재 보수 성향 6, 진보성향 3으로 기울어진 대법원의 구성을 볼 때 제2, 3의 텍사스가 줄줄이 나올 가능성도 제기된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텍사스법의 합헌성에 대해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다"고 말해 향후 법적 혼선이 불가피할 것임을 예고했다.

대법원은 보통 보수, 진보 이슈에 팽팽하게 갈리다가 대법원장의 스윙보트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지난 트럼프 정권이 보수 성향 대법관 3명을 투입하는 데 성공하면서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 CNN이 대법원 결정 직후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대법원의 통제권을 상실했다"고 헤드라인을 뽑은 것도 이 같은 보수 편향 대법원의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대법원의 성급한 결정도 도마에 올랐다. 2005년 부임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 성향이긴 하지만 '낙태 반대'에는 신중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법원에 대한 공공의 신뢰가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사법부는 미국 법률 시스템에 충격을 주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럼에도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3일 간의 심의만 거치고 전격 발표됐다. CNN은 "로버츠 대법원장의 평소 신념과 달리 심야에 이뤄진 전격적인 결정은 충격(jolt)이나 다름없고 여성의 헌법적 권리에 대한 공습"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으로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 낙태 이슈가 재점화했다. 줄소송과 시위, 대립과 격론이 불가피하게 됐다. 내년 하반기 중간선거 평가를 받아야 하는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아프간에서 한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국내에서 터진 화약고를 어떻게 진화해야 할지 힘든 숙제를 안게 됐다.

UPI뉴스 / 이원영 기자 lw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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